2012년 2월 9일 목요일

프레임적 사고?


과학 얘기가 나와서 한마디 거들자면, 인간의 뇌는 매우 정교한 시뮬레이션 기계라고 하죠. 아주 적은 특징적인 정보로도 거의 온전한 형상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습니다. 착시라던가 하는 게 이런 뇌의 기능을 활용한 재밋는 장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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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뭐가 있을까요. 그냥 꺽쇠 네 개인데, 아마 사각형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네 개의 모서리를 보고 나머지 부분을 뇌가 시뮬레이션해서 사각형으로 인지해버린 거죠.

저는 프레임이라는 것도 이런 시뮬레이션의 작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어떤 사물, 사건, 현상에 대해 모든 것을 100% 알 수가 없거든요. 어느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전체 인상을 완성하면서 빈 부분을 채워 넣는 거죠. 이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뇌는 그렇게 진화해왔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시뮬레이션이나 혹은 프레임화 자체가 아니라, 여러 정보 중에 어떤 것을 시뮬레이션의 입력 자료로 선택하느냐가 아닐까 합니다. 예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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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보고 사각형으로 시뮬레이션할 사람은 별로 없겠죠. '실제'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문제를 무시하고 말하자면 최대한 실제의 정보를 모두 입력하여 나오는 시뮬레이션이 비교적 객관적일 것이고, 몇몇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입력으로 시뮬레이션하면서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게 많으면 편향된 사고일 겁니다. 또는 원래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 웹기술 창안자의 음모로 브라우저에 표시되지 않거나, 배경과 같은 색으로 처리된 기호들을 몇 개 덧붙이고 기호와 여백을 적절히 해석하면 외계인이 지구인에게 내리는 지령문이 시뮬레이팅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걸 음모론이라고 하죠.

(왜곡된?) 프레임 제공자들은 적당한 모서리를 골라서 사람들에게 '이것이 중요한 사실이고 나머지는 부차적이다.'라고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특정 지역 사람 중에 깡패가 있다. 특정 지역 사람들이 배신한 사례가 있다. 특정 지역 사람들이 국론을 분열시킨 사례가 있다. 특정 지역 사람에 대한 인상을 시뮬레이션 하시오. .. 이런 식으로요.

이 상황을 벗어나는 데 두 가지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프레임을 갖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지역감정 프레임 대신 진보/보수 프레임, 진보/보수 프레임 대신 한국/북한 프레임, 한국/북한 프레임 대신 개도국 한국/선진국 프레임 .. 어느 경우에나 내부의 단결을 통해 사소한 지역 감정 프레임을 무력화시킬 수 있겠죠.
다만 이 경우는 또다른 프레임 제공자를 필요로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유도된 프레임이 더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다시 뒤로 남겨지겠죠. 이건 '프레임을 타파하자'라기 보다는 '이 프레임을 타파하자'라는 쪽에 가까운데 일반론적으로 적절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당신이 시뮬레이션을 위해 투입했던 자료들이 특정한 결론을 유도하도록 가공된 모서리들이 아니었는지 의심해보라'는 주문입니다. 이를테면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제공한 모서리들은 사법부의 권위주의를 부각시키는 것들이었고, 다른 정보 없이 이 모서리들을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법부의 부당함과 보수적 원칙주의자의 억울함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 겁니다. 반면, 여기에 '공판 기록'이라는 새로운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다른 결과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고요. 이 경우에서 '프레임 타파'는 단순히 '이 주장이 사실'들'에 부합하며 추론이 논리적, 합리적 추론인가'를 반문해보는 정도로 충분합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사실확인 자체가 힘든 경우가 많고, '확인된 사실'들 역시 다른 프레임 제공자의 필터를 거친 결과이며, 전문가 두뇌의 시뮬레이션 결과라는 어중간한 '사실'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말처럼 쉽진 않겠죠. 비스마르크의 '어떤 주장이 다른 주장과 부딪히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그 주장을 믿지 말라.'는 말처럼 어떤 주장을 취할 때 어정쩡한 회의적 태도를 조금은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시뮬레이팅의 결론 중에는 전혀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정신과학인지 뇌 과학인지 모르겠지만, 그 성과 중 하나는 사람의 뇌가 천차만별이라는 결론이라고 합니다. 위나 간, 폐, 장 같은 장기들도 개인차가 있겠지만 대개는 같은 구조와 작용일 것으로 기대하고 같은 처치를 하면 적절한 성과가 나오는 데 비해, 뇌 작용은 개인차가 현격하여 어떤 사람은 논문을 쓰면서 우뇌6:좌뇌4를 쓰는 반면 어떤 사람은 5:5, 또 다른 사람은 3:7로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임의의 수치입니다.) 우뇌와 좌뇌 활용도에 대한 남녀차에 대한 것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죠. 이 말은 곧, 사람 개개인마다 시뮬레이션을 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겁니다. 더우기 뇌는 학습에 의해서도 변하는데, 사람마다 쌓인 학습(경험) 역시 천차만별이죠. (유전자 결정론이나 문화 결정론 어느 것이라도 관계없이) 이런 차이들 때문에 겉으로는 동일해 보이는 경험을 했어도 전혀 다른 시뮬레이션 결과를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건 편견이나 왜곡된 시뮬레이팅과는 다르게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어찌보면 사람이 동물과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 '마음이론' - 다른 개체가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한 시뮬레이팅 -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 시각차는 인류 진화의 본질적인 동력, 따라서 인류의 본질적인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너무 나갔군요.. ^^;;)

하여간, '대립의 프레임'으로 얘기되는 것들 중 어떤 문제들은 이런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사실이나 현상에 대해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원래부터 다른 시각으로 보여지는 여러 개의 진실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가령 극단적으로 생각할 때 파시즘적 환경주의자, 환경파괴적 여성주의자, 마초적 진보주의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총균쇠인지 문명의 몰락인지에 보면 같은 섬의 좌우에 있는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소개됩니다. 도미니카 공화국 트루히요의 경우 전형적인 남미의 독재자이지만, 같은 시기 아이티의 독재자에 비해 환경 보호에 꽤 열심이었습니다. 현재 아이티 공화국은 거의 황량한 민둥산과 벌판으로 변했고,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숲이 있고 생산성도 꽤 되고, GDP와 1인당 GDP가 아이티 공화국에 비해 5-6배 정도 되죠. 정확한 문구는 기억이 안나지만 이 책에서 '환경에 대한 기여를 이야기하면 독재자를 칭찬하는 거냐면서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 라는 식의 얘기가 나옵니다. 두 가치는 원래 다르며,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거죠.
.. 비근한 사례가 우리나라에도 있죠. 남한의 숲이 비교적 잘 보존된 데에는 박정희의 군대식 녹화사업이 꽤 기여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시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산업화의 측면에서 남한을 앞서나갔고, 더 적극적으로 환경을 착취했죠. (다양한 정치적 조건들이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어쨋든) 박정희는 북한보다 더 열심히 산과 들을 파헤치지는 않았고 결과적으로 북한은 황색의 땅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북한 사진이라고 올라오는 걸 보면 끔찍하더군요. 뭐 트루히요나 박정희가 무슨 환경'주의자'씩이나 될 것은 아니고요.
* 참고로 극단적인 파쇼적 환경주의자는 접니다. 개인적으로 쾌적한 지구 생활을 위해서는 지구 인구의 95% 정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가 신 정도의 권능을 가지게 되면 실행할 계획이 있습니다. .....
다른 의미로 불편한 사례는 마초적 진보주의자일텐데, 이런 사람들 진보진영 전체에 골고루 포진되어 있습니다. 나꼼수를 겨냥한 게 아니라, 실제 빨갱이에 가까운? 진보주의자들 중에도 마초들이 많아요. 진보에 어느 정도 기여하고 나서야 이들의 마초성을 비판할 수 있다거나, 진보 마초를 비판하는 게 진보의 적이 된다거나 생각하진 않습니다.

실은 '진보'란 사회민주주의 실현이라거나 복지 확대라거나 하는 것 이전에, 하나로 통일되거나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관점들이 정당한 대접을 받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가령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이걸 다시 노동자(대중)에 의한 사회적 통제가 관철되는 사민주의나 사회주의로 대치하는 것이 어떤 부문의 진보적 경향일 수 있지요. 그러나 여성 억압 -> 여권 존중 이후, 또는 환경 개발 -> 지속가능한 개발 -> 이후에 이 흐름들이 복지 사회나 사민주의, 사회주의 같은 것으로 대치될 이유가 없습니다. 이건 전혀 다른 문제이고, 어떤 정체에서든 계속 존중받아야 할 관점이죠.
즉, 어느 한 시각에서 보는 진보적 경향이 꼭 다른 시각에서 보는 진보적 경향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진보주의자는 동시에 여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이것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둘은 원래 다른 가치일 테니까요.) 서로 자기 관점에서 다른 관점을 비판할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사회를 좀더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판을 존중해야 합니다. 또는 이런 비판이 좀더 존중되는 사회가 좀더 개선된 사회라고 할 수 있겠죠.
애초에 '원래 같을 수 없는 다양한 입장'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세력이 진보적인 입장이 되어 온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예컨대 여성 인권을 적극 옹호하고 환경 보호를 적극 실천하는 진보 세력이 정치적 진보가 급하니 여성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는 진보 세력보다 더 진보적이겠죠. 그런 세력이 현실적으로도 더 성공하기 때문에 요즘 여성과 환경은 진보가 아니라 민주 세력?의 필수 덕목처럼 되었죠. 통합민주당도 여성할당제 들고 나오는 거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율과 방법에 이견이 있을 수 있는데 그건 논외로 하고)

얘기가 길어졌는데 결론을 말하자면, 자신이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데 다른 가치들에 대한 요구 때문에 걸리적거린다고 생각될 때, 그것을 적극적으로 존중하는 태도야 말로 진보 또는 민주적인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더 중요한 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공조차 못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다른 가치를 요구하는 게 분열적이고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당연히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분열적이고 패배를 자초하는 행동라는 얘기입니다. 사회가 좀더 민주/개혁/진보 뭐가 됐든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뭉치자는 식으로 이견을 묵살하는 것 보다 다른 입장에 대해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먼저 필요하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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