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7일 화요일

광주 공수부대원

24년간 정신병 앓은 '제3 공수여단원'
<특별기고> '박하사탕'을 아직 곱게 간직하고 있는 내친구 김동관
2006-05-12 09: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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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는 14일 오후 11시30분 방영되는 MBC의 '5.18 특집기획 다큐' <내친구 김동관>에 출연한 필자가 지난 3월중순부터 4월말까지 동행 촬영한 후 쓴 특별기고다.

특집 다큐의 주인공 김동관씨는 1980년 5월20일 오전 7시 제3공수여단의 일원으로 전남대에 투입돼 진압작전에 참여했다. 김씨는 그후 24년여 동안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수도권에 있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현재 수원 아주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는 1980년 광주에서 그가 무엇을 보고 행하고 느꼈는지를 사건 발생 26년만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필자는 이 다큐에 출연하는 주인공 김동관씨의 대학입학 동기로서 지난 1977년이후 지금까지 30년간 주인공을 곁에서 계속 지켜본 절친한 친구 중 한명이다. 이제까지 광주시민, 민주열사 등 승자의 시각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이 조명되어 왔다. 하지만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공수부대원이 광주 진압후 얼마나 악몽같은 삶을 살아왔는가를 통해 광주항쟁의 본질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내 친구 김동관

어김없이 찬란한 5월이 또 왔다. 5월 광주민중항쟁,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완성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쟁취한 시민혁명이건만 그 속엔 텅 빈 구석이 넓기만 하다. 아직 공허함이다.

나에게는 친구가 있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7년 3월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에 입학한 동기생이다. 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 우리는 조국통일과 민주주의에 대해 고뇌했다. 그 이름은 김동관.

그 당시 고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고전연구회라는 이념 서클이 있었다. 동관이와 나는 이 서클에 가입했다. 지금은 우습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칠흙같이 암울한 독재정권 시절 학생운동은 투쟁의 방법론을 놓고 치열한 내홍을 겪곤 했다. 학내 시위가 잇따랐고 비교적 온건론을 편 김동관과 나는 이듬해인 78년에 서클에 이름만 걸쳐 놓는 상태가 됐다.

◀ 대학재학 당시 친구들과 포즈를 취한 김동관. 사진 왼쪽부터 김우진, 김동관, 그리고 필자. ⓒ 황남준


그는 1979년 5월 23일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다. 운동권 경력을 가진 그는 공수부대원으로 차출돼 거여동 제3공수 여단에서 공수 훈련을 받았다.

1979년 9월 초순 서울 송파구 거여동 제3공수 면회실. 이찬영, 김우진, 나(이상 대학동창), 이원호(중학교 동창) 등 네 사람은 동관이 녀석 먹일 닭튀김과 음료수 등을 싸들고 면회를 갔다. 우리는 조금 걱정했다. 곱게 커온 녀석이 논산훈련소를 거쳐 험하기로 악명높은 공수훈련까지 잇따라 받았으니 거의 초죽음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녀석은 의기양양한 자세로 우리를 반겼다. 자신이 공수부대원의 우상인 ‘막타워의 왕’이 됐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막타워', 그것은 비행기 낙하훈련을 하는 모형탑을 가리킨다.

"네 번을 제일 먼저 합격하는 사람이 왕이 된다. 막타워의 왕. 그게 나라고. 그러니까 네 번... 아니 다섯 번을 뛰었다. 네번째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너무 자신만만하게 뛰어가지고··· 그래 한 번 더 올라갔어. 그래 뛰니 합격이지 뭐. 그러자 조교가 오더니 군복 다 벗어라 이거야. 그리고 막걸리 한 독을 떡 갖다놓는 거야. 한 주전자 퍼가지고 딱 먹이고.
막타왕이 (특전사) 최고의 영예야. (동료들은) 다 훈련받고 얻어맞고 뺑뺑이 돌고 있는데 막걸리 마시고 있는 거야, 혼자서. 군복 아래 위 다 벗고 군화 끈 다 끄르고, 군용 팬티만 입고 말이야."

그러던 동관이 입대 1년후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하자 제3공수여단의 일원으로서 진압군으로 전남대에 투입됐다. 이것이 이 젊은 청년을 절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하는 계기가 될 줄이야.

◀ 공수부대 시절의 동관이. ⓒ김동관


달라진 동관이

5.18광주민주항쟁이 무참히 진압된 직후인 1980년 후반의 일이다. 동관이는 외박과 외출을 나와 학교 근처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길거리에 있는 군인들과 시비가 붙어 곧잘 싸우곤 했다. 주로 동관이가 먼저 말을 붙이고 서로 주먹다짐이 오가는 식이었다. 우리는 녀석의 달라진 모습에 너무 놀라곤 했다. 군대가기 전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러던 중 1981년 여름 어느 일요일 오전. 나는 9월 입영날짜를 받아놓고 서울 도봉구 수유2동 도성암이라는 절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동관이 어머님이 잠시 집에 와서 점심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주셨다.

청파동에 있는 동관이 집으로 갔다. 동관이는 외박을 나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후에 귀대 예정이었다. 동관이 아버님이 따로 부르셨다. "동관이가 혼자서 중얼거리고 자주 화를 내고 잠자다 괴성을 지르는 등 무언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셨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어떨까 궁금해서 불렀다는 것이다.

동관이는 나를 반겨하면서도 표정이 밝지 않았다. 대화도중 하느님과 예수님을 가끔 언급하다가 가끔 언성이 높아지는 등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모처럼만에 갈비찜 등 푸짐한 고기음식을 많이 내주셨다. 동관이가 몸이 허해 가끔 헛소리를 하는 것 같으니까 고기를 많이 준비하셨단다.

"제대를 앞두고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서 그럴수도 있겠지요"라는 말로 위로의 말씀을 건넸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관이 부모님이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걱정이 되길래 나를 부르셨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당시 정신병이라는 것은 패가망신하는 병으로 인식된 만큼 "내 아들이 그런 병에 걸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동관이 어머님은 회고하신다.

동관이는 1981년 11월5일 제대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982년 봄 정신분열증으로 고대 근처 베드루 병원에 한달간 입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생의 절반이 되는 24년동안 전국의 정신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병명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등 정신분열증이었다.

광주의 참극, '특전사의 무차별 학살'

도대체 1980년 5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20여년간 필자 등 몇몇 지기들에게만 파편적으로 당시 참상을 말하던 그가 비교적 건강상태가 양호해진 최근 필자가 동석한 가운데 MBC 등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밝혔다.

진압군 최후의 보루, 정예중의 정예인 제3공수여단의 일원이었지만 그는 시민군에 결코 총을 겨누지 않았다 했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광주시민과 대학생들의 원통한 고통과 죽음에 대해 강렬한 몸짓으로 상관들에 항거했다 했다. 실제로 그는 “전두환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81년부터 술을 한 잔 걸치면 입에 달고 살았다. 또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중 유독 악랄하게 시민군을 살해한 하사관들에 대한 적개심을 달래지 못하고 병영내에서 이들 하사관과 격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한다.

"명령은 데모대 중에서 무장한 경우에만 사격을 하게 돼 있었어. (그런데) 얘들 특전사 요원 애들은 무차별 사격했다고, 무차별로. 내가 그걸 봤어. 무차별 사격을...
'서!' 그래서 안 서면 그냥 쏴 버렸어. 무장을 했건 안했건. 도망가면 무서워서 도망가면. 그걸 쏴 죽였어. 이 특전사 애들이. 그러니, 무차별 학살이지 무차별 학살...
나는 광주 시민을 쏘는 특전사를 쏴 죽일라 그랬단 말이야. 근데 그걸 차마 죽이진 못하고..."

"전남대에서 광주 교도소로 이동했을 때 일이야. (시위대가) 탈취해 온 버스가 있었는데 문이 안열려서 문을 억지로 빵 쳐서 열었더니, 운전수가 총을 맞았는데 의자가 뒤로 딱 제껴져 있었어. 운전수가 딱 누워있는데 살아있었어. 그런데 눈에 총알을 맞았어 눈에... 심장은 뛰더라고, 만져 보니까.
버스 앞에는 전부 총알 구멍이야. 총알이 눈에 맞았는데 심장은 살아있고. 그때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몰라.
그걸 어디 묻을 수도 없고, 살아있으니까. (그때만 해도) 암매장한 게 많아, 시신 암매장 한 게...묻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 그래서 운전수를 나무 밑에다가, 그 전남대 산 나무 밑에다가 들어다가 놓고 왔다고 그냥. 살아있으니까. 치료해 줄 수는 없고...그후 이동했는, 그 때 참 처참하더라고.
그 때 전두환이를 죽여야 되고 노태우도 죽여야 되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
매일매일 (그) 생각하면 술이 안 끊어지는 거야 술이. 슬퍼서... 복수를 해야겠다고 불타는 게 아니라 슬퍼서. 그게 슬퍼서 그들의 죽음이 슬퍼서..."

◀ 광주민중항쟁을 진압 중인 공수부대원들. ⓒMBC


광주에서 성남 거여동 제3공수여단 본부로 복귀한 뒤에도 그는 광주참살에 관여한 상사들과 부단히 부딪쳤다.

"내가 술을 먹을라고 남한산성으로 보고를 하고 올라갔어. 거여동에 그 뒷산이 남한산성이었거든요. 거길 올라갔는데 늦게까지 안 오니까 상사인 박OO 중위가 탈영보고를 올렸어. 잡으러 올라와 끌려내려갔지. 두드려 맞고.
화는 났지. “박중위 나와” “내가 보고하고 올라갔는데 너 왜 탈영보고 올렸니”
박중위는 분명 부관실에 있는데 안나오더라고. 그래도 계속 “박OO이 나와" 이러니까 “이 새끼”하고 권총을 딱 들고 나오더라구.
권총을 들고 나오니까 그 때서야 아차 싶더라고. 그래서 그은 거야(왼 손목을 가리키며) 특전사는 이렇게 한 번 자해를 하거나 하면 그냥 지나가. 특전사가 워낙 험악하게 훈련을 받고 험악하게 하기 때문에 ··· 그래 이걸 그어버린 거야. 필름 끊어져서 엄청 취해가지고. 기억이 나는 게 네 바늘 꿰맸는데. 세 바늘째 따끔따끔해서 보니까 의무관 중사가 꿰매고 있더라고. 그래 가지고 일주일을 쉬었어.
중사, 저 애들하고 사이는 좋았는데, 술 먹으면 많이 싸웠어. 왜냐면 이 새끼들이 죽였거든."

탈영보고 사건후 동관이는 엄청나게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아마 그의 병세는 탈영보고 사건과 이에 따른 자해사건, 이후 살인적인 기합과 구타 등이 잇따르면서 5.18 광주 출동후 잠재해 있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표면화된 것으로 보인다.

광주 민중항쟁에서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총부리를 겨눈 하사관들과의 잦은 충돌, 살인적인 구타와 집단적인 따돌림, 탈영보고와 자살기도 등··· 고귀한 영혼과 여린 가슴을 지닌 그에게 역사의 질곡과 지옥같은 병영생활은 너무 버거웠던 것일까. 자책감과 분노감을 이기지 못하다 끝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끈을 놓아 버렸다.

부친 홧병으로 돌아가시고 24년간 정신병원 전전

동관이는 제대후 복학과 휴학을 반복하면서 정신병원 신세를 졌다. 1980년대 그가 입원한 병원만 경희의료원, 강남 성모병원, 고대 병원, 용인정신 병원 등 즐비했다. 당연히 직장을 잡을 엄두를 낼 수도 없다. 특히 이 병에 대한 무지와 정신병에 대한 일반의 냉소적인 인식 등이 겹쳐 동관이는 정신병의 초기 치료에 실패한다.

평소 간경화병을 앓으시던 부친께서는 금지옥엽처럼 키운 아들이 몹쓸 병을 얻어 처절하게 망가진 모습을 보고 가슴이 미어진다. 1983년 12월 홧병으로 피를 토하고 돌아가신다.

82년 봄 복학을 한 동관이는 이듬해부터 휴학, 정신병원과 복학 등을 거듭한 끝에 85년 가을 가까스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동관이가 정상적으로 학점을 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배광복(현재 통일부 근무)과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의 도움과 친구 아버지인 이준범 전 고대 총장님의 배려가 있었다.

그에게도 잠시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1991년 3월 이OO씨와 결혼한 것이다. 교회에서 만나 주위의 도움으로 인연을 맺었다. 신접 살림을 신림동엔가 차렸는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모처럼만에 찾은 정신적 육체적 평온의 시절은 그러나 1993년 아들 OO의 출생 직후 음성정신병원에 장기간 입원함으로써 마감하게 된다.

신혼생활중에도 반포에 있는 용인정신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았지만 환청과 음주, 폭언과 폭행 등이 잇따르면서 상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를 반기는 곳은 이제 정신병원뿐이었다. 결혼 11년이 다되어가는 2002년 2월 동관이는 아내와 아들의 평화를 위해 합의이혼을 했다. 그러나 두 사람간의 신뢰와 애정은 아직 애뜻하다. 아니 사랑의 끈은 아직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다. 전 부인은 아직까지 동관이의 입원비의 일정부분을 보태며 아들을 튼튼하게 키우고 있다. 동관이도 내심 자신의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염치가 없어서인지 내색을 안 하고 있다.

동관이는 요즘 이혼 당시보다 훨씬 건강상태가 양호하단다. 이혼후 국립춘천병원에서 잘 처방된 약과 자신의 강력한 재활의지 덕택이다.

◀ 아주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 김동관(오른쪽), 동관이 모친 김영순 여사, 그리고 전성. ⓒMBC


동관의 친구들

지난 2004년 사법고시에 늦깍이로 합격해 현재 사법연수원에 다니는 전성 예비변호사도 동관이와 같은 서클 출신이다. 그는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감옥생활을 했고 그후 줄곧 재야와 진보 정치운동권에서 자라왔다.

그는 의협심이 강하다. 추진력도 보통이 아니다. 이찬영과 김원갑, 김우진과 나 등 주위의 친구들이 김동관의 처지에 대해 안타까워 할 때 그는 혜성처럼 나타났다.

친구들은 지난 98년 동관이의 아내 이OO씨와 머리를 맞대고 동관이에 대한 명예회복과 군복무중 공상을 입은 군인으로 국가의 보상을 받을수 있도록 법적인 해결을 추진했지만 사회적-행정적-사법적인 장벽에 가로막혀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이제 전성이가 나타나 새로운 힘을 얻고 있다.

전성이는 MBC측에 자신의 방송 아이템을 제시했고 이는 김영호 PD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 김 PD는 베트남 병사들의 전쟁 후유증에 관한 다큐를 제작하는 등 전쟁의 파괴성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방송인이었다.

이찬영과 김원갑은 MBC가 촬영 작업이 들어갈 때 방송국과 친구들, 그리고 친구들간의 가교 역할을 자원하며 바쁜 직장생활 와중에 시간을 쪼개어 동관이를 위해 진한 우정을 발휘하고 있다. 김동관이 이처럼 많은 친구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아직까지 받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대양같은 마음을 품고 육대주를 누비겠다”던 호연지기와 주위사람들에게 너그럽고 자상하게 대해주는 따뜻한 인간 됨됨이를 30년이 다되도록 친구들이 아직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에필로그

내 친구 동관이의 이야기는 지난 2000년 상영된 또 다른 한편의 <박하사탕>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두 주인공이 걸어간 길은 정반대다.

영화속 주인공 김영호(설경구 분)가 가학적이라면 김동관은 자학적이다. 김영호가 타락했다면 김동관은 박하사탕처럼 순수하다. 김영호는 박하사탕을 짓이겨 으깨버렸지만 김동관은 박하사탕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영화속의 김영호는 5월 광주 민중항쟁 발발시 갓 자대에 배치된 신참 육군 이병으로 진압작전에 투입됐다가 칠흙같이 어두운 밤 여학생을 총기 오발 사고로 죽이게 된다. 이 사건은 김영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그는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인물로 변한다. 제대 후 경찰에 투신한 그는 시국사범을 체포해 무자비한 구타와 물고문 등을 자행하는 전형적인 악질 형사로 변한다. 94년 10년간의 형사생활을 청산하고 가구점 사장으로 화려한 변신한다. 그도 잠시. 주인공은 가정 파탄과 잇따른 사업 실패로 폐인이 된다. 99년 가을, 첫 사랑 윤순임(문소리 분)을 암으로 보낸 3일 뒤, 철길위로 올라가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마주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내친구 동관이는 박하사탕의 주인공과 다른 길을 걷는다. 김영호처럼 어엿한 사회생활을 하며 역사에 대한 분풀이라도 해봤으면 덜 후회스럽겠건만. 바보같은 그는 그저 정신병원을 전전할 뿐이다. 그 과정은 자신의 가정과 부모 형제와의 파탄의 연속이다. 역사적 질곡을 조그마한 가슴에 묻은 채 촛불처럼 스스로를 태운다. 그리고 어느 덧 쉰 살이 다 됐다. 이제 우리 사회가 그의 고통에 답할 때다.
황남준 한국금융연구원 초빙연구원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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