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5일 목요일

나는 왜 투표하는가?

출근 길에 홍세화 대표님의 '나는 왜 투표하는가'에 대한 진보신당 당원의 에세이를 구한다는 (리)트윗을 보았다. 이생각 저생각하다보니 글로 정리해야 할 것 같아서 쓰긴 썼는데, 에세이 형식에 맞는 글인지 모르겠다.

나는 39세, 두 아이의 아빠고 직장인이다. 직장 중에서는 급여나 회사 규모, 안정성 뭘로 봐도 아마 별로 안좋은 축에 속할 거다. (어쩌면 남들도 나처럼 못사는 것으로 보아 보통 수준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신당 당원이다.


‘나는 왜 투표하는가?’출근길에 트윗을 보고, 자리에 앉아 오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질문은 무슨 의미지?”였다. 설마 ‘왜 투표를’하느냐에 대한 질문인가? 그렇다면 의회주의가 어쩌고 저쩌고 .. 에 대해 정당 운동의 필요성을 말하라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그걸 별로 문제삼는 분도 없고 이 질문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 진보신당의 역사 때문일 텐데 그 역사에서 비롯된 또 다른 질문이 연이어 일어난다.

‘진보신당 당원은 왜 진보신당에 투표를 하느냐?’ 통상적으로 어떤 당 당원이 그 당을 찍는 건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보신당에서는 필요했었다. 진보를 위해 다른 당을 찍어야 한다는 주장과 진보신당 당원은 진보신당을 찍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던 때가 있었다. 참 희한한 논란이었는데, 지금은 다행히 그런 토론을 벌일 사람이 별로 없다. 불행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각자 자신이 찍을 수 있는 당으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진보신당에 남았지만, 다른 길을 택하신 분들도 인간적으로는 존중한다.) 하여간 진보신당원은 아주 정상적인 질문을 보고도 복잡한 기억을 되새겨야 하는 약간은 불쌍한(ㅜㅜ) 존재임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왜 진보신당에 투표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내가 아주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내 삶의 조건은 아직은 나쁘지 않지만 썩 좋은 편도 아니다. 아직은 먹고 살만하지만 앞을 생각하면 답이 없다. 애들은 또 어떻게 키워야할지.. 아이들이 좀더 커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면 내가 돈을 많이 벌어 기득권을 향유하거나, 세상이 바뀌는 수밖에 없다.

사업 감각이 부족한 나로서는 노동자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데, 노동자가 돈을 많이 벌기란 로또 맞는 것보다 힘들지 않을까? (애를 낳기 전에는 그래도 저축을 좀 했는데 ...)

그러니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은 로또를 맞거나 vs 세상이 바뀌거나 둘 중 하나인데,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것은 세상이 바뀌는 쪽이다. (로또에게 표를 줄 일이 없으니 어느 쪽이든 세상이 바뀌는 걸 바라야 한다.) 따라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적어도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정당에 투표를 하는 것이 제일 현실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진보신당의 당원이고, 진보신당에 투표한다.


지극히 문제적인 현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다른 현실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진보신당은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고, 세상에 영향을 줄 힘을 가진 정당은 다른 당이라고...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 당들이 세상을 바꿀 힘은 있을지 몰라도 세상을 바꿀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영향을 줄만큼 큰 정당들이 FTA를 추진할 의지를 가졌다는 사실은 정말 현실적이기는 하나, 이건 나와 대다수 국민이 곤궁한 삶에 처하게 되는 원인이지 해결책이 아니다.

다시 반론이 온다. 좋은 FTA와 나쁜 FTA의 차이, 고뇌에 찬 쌍용차 매각 명령과 철면피같은 쌍용차 구조 조정의 차이, 동북아 균형자로서 발언권을 의식한 자주적 파병 명령과 굴종적 한미동맹을 위한 파병 찬성의 차이 같은 것, 또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추리 폭력 진압과 안보장사를 위한 구럼비 폭력 진압의 차이 ...... 물론 전문가적 식견에서 살펴보면 차이가 있기는 할 것이다. 완전히 똑같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사장이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구조조정을 하건 시시덕거리며 구조조정을 하건 내 목이 날아가는 건 매 한가지. 내가 그 차이를 심각히 고려해줄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조금은 낫다는 그들이 아무리 나를 위해 고뇌하고 배려하는 척 하더라도, 결정의 순간이 오면 그 나쁘다는 놈들과 같은 결단을 내릴 것’이라는 방증이 아닐지.


다시 왜 진보신당에 투표하는가?

기러기가 그리는 V자는 그 무리의 기러기들이 모두 마음속으로 V자를 그리며 그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날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기러기들은 단순히 시야를 확보하고 공기 저항을 줄이며, 서로 비행에 방해가 안될 만큼 거리를 둔다는 단순한 규칙을 따라 날 뿐이라고 한다.

내가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하는 데 무슨 거창한 식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정치 개혁을 하기 위해 내가 친이·친박계의 갈등, 친노의 고뇌에 찬 타협이나 합리적 보수의 상대적 우위라거나 이들의 역학 관계나, 심지어 어떤 정치인 개개인의 속사정 .... 등등 이런 걸 고려할 필요가 있을까.

대신 사람은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아주 간단한 규칙, 나를 포함해서 내 주변에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에 따라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 “우리 삶을 바꾸자.” 이걸 해주는 당에 투표한다. 그게 진보신당이다.


ps'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1번으로 비정규직 청소노동자 김순자 님이 결정되었다. 김순자 님은 아마 고도의 정치력 같은 건 없으시리라 생각한다. 다수당의 역학 관계 속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며 정치 지형을 어쩌고 ... 이런 걸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4년 동안 국민의 세금으로 비정규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정책 대안이 개발되고, 그것이 국회에서 단말마나마 외쳐지겠지. 이것만으로도 진보신당을 찍을 이유는 충분하다.


ps'' 도박도 안하고 사치도 안하는 맞벌이 부부가 애 둘을 키우는 데 그리 많은 절망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원하는 것, 총장 한 명의 방이 20평인데 수십 명의 청소 노동자가 화장실 구석 말고 쉴 수 있는 방 한 칸 달라는 것, 라면 한 개가 3500원인데 대학 졸업해서 88만원 보다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 겨우 200km 거리에 있는 원전이 수시로 고장나는 데 대한 확실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 ..

이게 너무나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43년 전에 어느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2012년 3월 9일 금요일

기소청탁 두 번째

한 트위터리안과의 대화
밤늦게까지 이어진 대화였지만, 개인적으로 인터넷을 통한 논쟁에 대해 가지고 있던 회의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일이 되었다. 인터넷용 격렬한 말(=비속어)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대충 합의가 된 듯.

1. 문제가 되는 상황
일단, 트위터 토론이 그렇듯 여러 논점이 있고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라서 처음에 혼선이 있었는데,
혼선 중의 하나를 짚고 넘어가자면 '아웃팅인가 = 즉, 취재원 보호 의무를 어겼는가의 핵심적인 문제는
[박검사가 기소청탁 사실을 진술했다.]가 아니라 [박검사가 주진우의 취재원이었다.]에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취재원은 지난 10월 주진우의 폭로 '검찰 관계자에게 들었는데, 기소청탁이 있었다.'라는 기사에 대한 취재원을 가리키며, '그 관계자가 박검사다'라는 얘기가 되겠다.
** 따라서 설령 취재원이었더라도 나꼼수는 [박모라는 검사가 있는데, 검찰에 가서 기소청탁 사실을 시인했다더라] 라고 방송할 수 있었고, 이 경우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1-1 선결해야 할 사소한 논점
- 나꼼수는 제보자의 신원을 밝힌 것이 맞는가
나꼼수의 정확한 워딩은 ... 은 안들어서 모르고 나꼼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 인정하는 내용은 '검사는 진술하겠다고 했고, 꼼수 팀에서는 죽으라고 할 수 없으니 하지 마시라 했고, 꼼수팀에 말도 없이 가서 진술해버렸다.' 라고 한다.
[박검사가 주진우의 취재원이다.]라고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이를 들어 '주진우가 박검사를 취재원이라 밝힌 적 없고 아웃팅이 아니다.]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사건에 대해 진술을 하니 마니 하면서' 논의를 할 정도면 당연히 검찰 상황에 대한 정보가 왔다갔다 했을 것이고, 검찰 및 사건에 대한 정보는 검사로부터 기자에게 흘러들어갔다고 보아야 한다. 명시적으로 언급된 적은 없으나, 취재원임을 밝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것은 그 트위터리안과의 합의 사항)

2.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편의상 몇 개의 시점으로 나누어 아웃팅 여부를 판단해 보자.
ㄱ. 주진우가 '(익명의) 검찰 관계자'로부터 기소청탁 사실이 있었음을 제보 받아 보도함.
ㄴ. 박검사가 공안2부에 가서 기소청탁 사실이 있었음을 시인함
ㄷ. 나꼼수가 박검사에 대해 언급함 (위에 말한 대로, 취재원임을 밝힌 것으로 간주함)

나꼼수가 아웃팅을 했다는 얘기는, 3번에 가서야 비로소 박검사가 나꼼수의 취재원이었음을 알게되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2번에서 이미 실질적으로 박검사가 제보자임을 확신할 수 있으니, 사실상 공개된 제보자임이 공개된 것이고 나꼼수의 발언은 제보자가 누구인지 폭로하는 의미는 거의 없다는 반론이 있었다.
이유는 (1) 검찰에 진술한 내용은 어차피 빼도밖도 못하게 공개되며, (2) 제보자가 아닌데도 그런 양심선언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

(1) 진술 내용은 어차피 공개되므로 이미 확정적인 사실이 된다는 의견
- 검찰 조사의 성격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상황은 나경원측의 명예훼손 고소와 주진우의 무고죄 고소로 발생한 것이다. 검찰은 일단 사전 조사를 해야 한다. 꼼수 방송의 내용 (정확한 워딩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꼼수 애청자가 작성했을 봉주 7회 요약이라는 게시글에서 퍼왔다. [이건으로 공안 2부가 맡아서 그당시 사건을 맡은 검사를 조사했다. 검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검사는 주진우에게 구속영장을 치기로 내부결정을 한다.] 이로 보아도 검찰은 이미 이 사건에 대해 담당 검사를 조사했다.
조사의 내용은 '기소청탁이 있었는가?'에 관한 것이다. 공안2부에서 담당 검사를 붙잡고 '니가 제보자냐?'라고 물을 이유가 없다. 설령 물었다 하더라도 박검사의 대답은 둘로 나뉜다. '예/아니오.' 하지만, 박검사가 공안 2부에서 어떤 질문을 받고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아직까지 정보가 없다. 그런 이유로 [검사가 저 질문을 한 것이 틀림없고, 또한 박검사는 예라고 답한 것이 틀림 없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진술에 드러나 있을 것이고 그 내용은 빼도밖도 못하는 사실로, 공표될 것이 뻔하므로' 이미 공표된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 검찰에 출두해 이미 사실로 확정되었어도 주진우는 밝혀서는 안된다는 것이 취재원 보호 의무인 듯 하나, 여기서는 그 점은 논의하지 않았다.

(2) 박검사가 공안 2부에 가서 사실을 밝힌 행위 자체가 스스로 제보자임을 인증했다는 의견
- 현재까지의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ㄱ. 박검사는 과거 기소청탁에 가담했다.
ㄴ. (이를 주진우에게 제보했다.)
ㄷ. 고소전이 벌어지자 1차 조사를 받았다. (꼼수에 언급된 기억나지 않는다는 진술은 박검사의 것인지 최검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ㄹ. (나꼼수측과 상의를 했다.)
ㅁ. 결국 검찰에 가서 사실을 시인했다.
ㅂ. 휴가를 떠났다.
ㅅ. (나꼼수가 터뜨리자 외부와 연락을 끊고 사표를 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박검사가 정의감에 불타는 영웅은 아니지만, 꽤나 양심적인 성향이라는 점이다.

- 박은정 외에는 제보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가?
요컨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당시 담당 검사인 박은정이 청탁이 있었던 사실을 밝혔다.'라고 했을 때, 우리가 이 사실로부터 '박은정이 주진우의 취재원'이었음을 추론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다른 제보자 후보의 존재 : 최소한 최검사라는 동등한 정보량을 가진 자가 존재하고, (검찰 조직과 그 운영을 몰라 대충 말하자면) 그 밑의 수사관이나 아니면 위의 부장검사라던가, 아주 희박하게 우연히 지나가다 포스트잍을 본 행정직원, 청소아줌마 등의 제보 용의자가 있을 수 있다. 이 가능성이 부정되지 않는한 주진우의 취재원이 박검사일수밖에 없다는 추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간접 증거? : 만약 박검사(또는 최검사와 박검사, 즉 사건 담당 검사) 외에 이 사실을 알 수도 제보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라면, 주진우 최초의 보도 - 검찰 관계자로부터 들었는데 기소청탁은 사실 - 로부터 박검사가 딸려나와야 한다다. 그러나 최초 보도 시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담당검사인 박검사 (혹은 후임인 최검사)가 취재원일 수밖에 없다고 추측한 것 같지는 않다.

사후적 추론 : 예컨대 나꼼수의 보도 없이 지금까지 상황이 전개되었다고 가정하면,
1차 '진술사실 폭로' 시점에서 '청탁 거부하고 지금은 폭로한 양심검사' 또는 '기소청탁의 공범이지만 꼼수의 활약에 압박받아 참회한 검사'의 두가지 가능성이 거의 대등한 확률로 존재한다(주1). (역시 꼼수 방송 없이) 며칠 후 박은정의 진술 내용은 '본인이 공범임을 자백'한 것으로 밝혀진다. 이는 외형상 제보자라기보다는 압박으로 인한 참회의 가능성에 더 무게를 실어준다.
** 주1 : 만약 '거부 - 폭로'를 가정한다면, 나경원은 '청탁했을 당시 이를 거부한 양심적인 검사'가 있었음을 알면서도 고소를 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아무리 정치적 고소라도 너무나 위험이 커보인다. 따라서 '나경원의 고소' 사실로부터 청탁 당시에는 박검사가 공범이었을 것이라는 미약한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치라는 게 워낙 비상식적인 일이 많으니 미약한 추측일 뿐이다.

** 요컨대 박검사가 공안부에 청탁 사실을 진술하였다 하더라도, 다른 제보자의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으며, 진술했다는 사실도 다양하게 해석 가능하므로, 박검사가 제보자임을 특정할 수 없다.



- 박은정은 제보자가 아니라면 진술했을리 없다?
박검사는 취재원 여부를 떠나 사건에 가장 깊이 개입한 사람의 하나이다. 박검사는 당연히 사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아마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공안2부에 가서 진술할 때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고, 제보자가 아니더라도 주기자가 피해를 입을 상황을 알고 있었다고 본다.)
물론 박검사의 심경은 외부인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 본인은 분명 기소청탁이 사실임을 알며, 기소청탁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무고한 기자가 불이익을 받는다.
(나) 자기가 제보했기 때문에 주진우가 피해를 받는다는 책임감, 또는 그동안의 동지의식?에서 비롯된 주진우에 대한 배려로 진술했다.

박은정이 진술했다면 제보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박검사가 (가)의 상황만으로는 진술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가) + (나)의 상황에서만 진술을 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가)의 상황을 특별히 배제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사후적으로 많은 일을 알고 있는데, 박검사는 꽤 양심적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박은정 검사의 심경 자체를 알 필요는 없다. 다만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 (가)를 배제하고 (나)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박검사가 공안부에 가서 기소청탁이 사실임을 진술한 시점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 그리고 공안부 검사는 - 박은정이 꼼수의 제보자임을 알 수 없다.
** 다만, 공안부 검사는 검찰 내부의 스크린을 통해, 예컨대 '박검사가 평소 양심적이었다.' 라거나 '당시 박검사가 주기자를 만나는 것을 보았다'라거나 하는 제보 등등을 통해 박검사가 제보자였을 것이라고 독자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기자가 취재원을 밝히는 것이 정당한가 여부와 논리적 관계가 없다.

3. 결론
박검사가 제보자였음은 '꼼수의 방송을 통해 비로소' 확신할 수 있게된다.

4. 논의하지 않은, 남은 문제
- 진술한 시점에 '박검사가 주진우의 제보원임이 확정'되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 사실을 알게된다 하더라도 주진우는 자기의 취재원을 밝혀서는 안된다는 것이 취재원 보호 원칙인 듯 하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정도까지 강력하게 지켜지지야 않겠지만.

- 나꼼수가 취재원이 박은정 검사임을 밝혀서 '어떤 추가적인 피해가 발생했는가' 여부는 논의하지 않았다. 많은 가정들이 필요하고 대부분 쓸모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나꼼수의 발언으로 박검사에게 어떤 피해가 생기거나 혹은 심지어 어떤 이익이 결과적으로 생겼다 하더라도 박검사를 대신하여 오픈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2012년 3월 8일 목요일

기소청탁 사건에 대한 의견 ..

사태가 대충 정리되어 가는 것 같은데.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김판사가 박검사에게 청탁을 했다.
2. 박검사는 청탁을 수용했고, 이를 후임에게 전달했다.
3. 나경원의 고발로 검찰이 조사를 시작
4. 어떤 이유로 박검사가 검찰 공안부에 청탁이 사실이었음을 진술
5. 박검사 휴가
6. 나꼼수 "박검사가 청탁이 사실이었음 진술했다." 방송
7. 박검사 외부 연락 차단
8. 박검사 사표

여기서 7과 6의 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휴가를 내고 외부와 연락을 차단하고 있었던 중 꼼수 방송이 나왔을 수도 있다.

하여간, 새로운 증거들을 취합하여 타임라인으로 늘어놓으면 두 가지가 눈에 띈다.

4. 박검사는 어떤 이유로 검찰에 가서 진술을 했을까. 그 진술의 성격은 무엇인가?
5. 휴가는 어떤 의미일까?

꼼수 : 주기자를 보호하기 위한 영웅적 고발 = 매우 의로운 박검사
중권 : 같은 법조인 또는 판사 선배와 억울한 사람 모두 피해를 받지 않기 위한 은밀한 사실 진술 = 비교적 양심적인 박검사

그동안 5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새로 밝혀진 사실들과 결합해 보면 검찰에서의 진술은 박검사에게 중대한 심경의 변화를 가져온 것 같다.
이제 새로운 시나리오도 가능해졌음

새가설1 : 검찰의 조사에 소환되어 적극적인 거짓말을 못하고 사실을 진술 = 소극적, 수동적, 최소한의 양심적 박검사 = 휴가는 일종의 견책 상태일 수도 있다.
새가설2 : 기소청탁이 사실이었고 본인이 공범이었음을 자수하러 감 = 소극적, 능동적, 적당히 양심적 박검사 = 휴가는 본인의 자책감 등으로 심경을 정리하기 위한 시간
물론 가설들일 뿐이지만 ..

후임인 최검사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천연덕스럽게 군 것 보다야 박검사가 굉장히 양심적인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정의감에 충만한 검사라고 보기는 좀 어렵다. 일단 기소청탁을 수용하고 후임에게 전달까지 하면서 적극적 역할을 하였으므로 ... 영웅적 고발일 가능성은 낮은 듯 하다. 오히려 진중권이 제시한 것과 이유는 좀 다르지만 박검사로서는 주진우가 처벌되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사건을 무마하는 쪽을 바랬을 가능성이 높다.

나꼼수가 '왜' 이 사실을 터뜨렸나 하는 문제도 짚어볼 수 있다.
일단 박검사가 검찰에 사실을 밝힌 단계에서 주진우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실명을 깠는데, 이는 사건을 더 확대하자는 얘기. 나꼼수의 입장은 '사건을 키워서 국민적 관심을 주어야 박검사가 보호된다.'라는 것이고. 그런데 살펴본 바에 의하면 사건이 커지면 박검사는 굉장히 곤란한 처지에 처한다.

여기서 다시 의문
나꼼수는 이러한 사실을 얼마나 알고 터뜨렸을까?
1. 나꼼수는 적어도 박검사와 관련한 부분은 잘 몰랐다. 나꼼수의 시나리오에서 박검사는 굉장히 정의로운 검사다. '기소청탁 공범'인 박검사상과는 잘 맞지 않는데, 이는 최초의 주진우 취재 과정에서 박검사가 자신에 대한 부분은 빼고 기소청탁의 사실 여부만을 제보했고, 주진우가 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였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경우 나꼼수는 굉장히 정의로운 박검사를 위해 대신 뻥 터뜨려줬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나꼼수에게 박검사를 대신하여 그런 판단을 내리고 행동에 돌입할 권리가 있느냐는 점은 문제가 된다.

2. 나꼼수는 박검사의 범죄 연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명을 깠다는 것은 이 사건을 공론의 장에 빼도박도 못하게 공표하겠다는 얘기. 그러나 이 것은 나경원과 남편과 악의 무리 검찰(?)과는 달리 사실을 얘기해줄 사람을 전제로 한다. 그 사람은 물론 박검사.. 즉, '박검사는 거짓말을 못하니까, 공론장에 끌어내 놓으면 기소청탁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할 수 있다.'라는 얘기가 된다. 계산상으로야 맞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의적으로 박검사에게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박검사의 마지막 남은 양심을 아주 잔인하게 이용해먹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주진우는 '취재원 보호'라는 의무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

다시 '왜?'를 생각해 보면 .....
1 상황에서 나꼼수는 밝힌 바와 같이 순수한 선의로, 부정한 검찰 조직에 대항하는 선량하고 힘없는 일개 평검사에게 국민적 관심을 실어주기 위해 공표했다. 결과는 물론 대실패. 실패의 이유는 자기가 소설을 쓰고 그 소설에 맞춰서 행동했기 때문이다.
본인의 경험으로는 생각없이 열정만 충만한 사람들은 굉장히 위험하다. 그런데 '열정' 자체로 긍정적이라면서 (일부는 일리가 있다.) 열정을 북돋울만한 소설들을 써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김어준이다. 그런데 이들이 소설을 써줄 수록 '열정과 조금의 이성'을 겸비했던 최초의 집단은 점점 '열정만'을 강조하게 되고 결국엔 맹목적인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소수로 전락한다.
이 단계에서 열정을 촉발시킨 최초의 긍정적인 의미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처음에 원했던 어떤 좋은 목적은 이들 때문에 오히려 방해를 받게 된다. 꼼수, 정확히는 김어준식 소설이 듣기는 좋아도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은 그냥 소설로 즐겨라.

.....
2 상황에서는 문제가 복잡하다. 사건을 '국민적 관심사'로 키운다는 건 일종의 정치적 퍼포먼스가 될텐데 ... 이건 아닐 거라고 믿는다.

2012년 3월 5일 월요일

음모론이란 무엇인가?

0. 우선, 음모론에 관한 위키 백과의 설명
음모론(陰謀論, 영어: conspiracy theory)이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할 때, 배후에 거대한 권력조직이나 비밀스런 단체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정확한 정보를 듣기 힘든 격동기나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러한 음모론들이 많이 유포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음모론은 사회의 위기 상황이나 인간의 한계 상황, 혼란 때 많이 유포되며, 상상력에 의존한 근거 없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물론 평범한 이야기에 살과 뼈가 덧붙여 부풀어 오른다. 대표 사례가 성전 기사단으로 중세 유럽의 영토와 재산을 둘러싼 영주 간의 싸움에서 음모론으로 비화한 것에서 볼 수 있다.
음모론은, 일반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사건을 주관적으로 이해하려 하거나 또는 부정확한 정보들이 난무할 때,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평소에 간과되었던 부분이 해당 대상과 관련점이나 유사점이 엿보일 때 이에 대해 과다하게 집중하면서 가정과 비약이 덧붙여져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 저변에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엔 절대 우연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엿보인다. 즉, 지나치게 사건 진행 간의 개연성에 집착하다 그 과정에서 사건의 발생을 가능하게 한 요소들 중에서 우연적이었지만 또한 결정적이었던 요소는 일체 배제하고, 반대로 사건 발생 당대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간과된 가정들을 지나치게 맹신하고 근거로 삼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간략히 말해 어떤 사건, 현상에 대한 설명인데 부정확한 정보로 인한 혼란 속에서 주로 발생하며, 일련의 사건들을 배후의 조직이나 단체에 의해 기획되었고 주로 가정하고, 여러가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요소를 배제하는 한편,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부분을 과장, 주목하여 만들어진 설명입니다.
물론, 다소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거나 그렇지 않다고해서 그것이 꼭 진실에 가깝거나 먼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사건의 배후에 실제로 단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쨋거나 음모론의 전체적인 윤곽과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음모론에 대해 알아봅시다.

1. 사람이라는 동물
아마 진화의 결과일 것으로 추정되는 인간이 가진 특성 중의 하나는, 인간이 사건, 사실, 현상에 대한 어떤 '설명'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요즘에야 과학적 분석과 설명이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있지만, 아직도 '과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틈은 '미지의 것'으로 남겨지기 보다는 의례히 과학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죠. 사람들은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것의 존재를 그냥 두려고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인간이 겪어온 생물학적 진화의 일종의 부작용일 것입니다.
이 진화의 동기로는 첫째 두려움을 해소하는 방식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 천재지변이나 재난은 아무나 임의로 덮치는 게 아니라 잘못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잘못하지 않으면 안심해도 좋다.
둘째로는 자연에 대한 지식 축적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일식은 불개가 해를 삼켰다 뱉었다 하는 것, 해와 달은 모종의 신화적 이유로 만날 수 없다. 나일강의 범람은 오시리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시스의 눈물 ..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의 눈으로 보기에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나일강이 반복적으로 범람한다는 지식을 전하기에는 충분한 이야기입니다.
세째로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패턴 인식에 강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강한 것은 얼굴을 인식하는 것인데, 점 두개와 직선 하나에서 사람의 얼굴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초식-잡식의 야행성 동물에서 초원을 거닐고 대형 포식 동물과 경쟁해온 인간의 진화 여정상 포식 동물의 일정한 패턴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사람이 여러 가지 사물에서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어떤 사물이나 자연의 섭리 같은 것을 의인화하는 경향으로 이어진 게 아닌가 합니다.
대략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접하는 사물, 사건, 현상에 대해 어떤 형태로건 설명을 붙이려 합니다.

2. 사실과 추론
사건에 대한 설명은 팩트-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나일강이 범람한다는 것은 팩트이고, 이것이 오시리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시스의 눈물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은 범람의 원인에 대한 설명이죠. 과학적으로는 상류에 내리는 비와 빙하 녹은 물이라는 또다른 사실을 이유로 제시합니다. 사실 이집트 인들도 이를 알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시스가 하늘에 있고 그 눈물이 비로 내린다고 약간 수정하면 역시 설명할 수 있죠. 이집트 인들은 범람에 관해 하나의 사실과 장대한 신화를 필요로 했는데, 이 단계에서는 두 개의 사실을 확보했고 신화는 여전히 장대하지만, 해설해야 할 분량은 약간 더 줄었습니다.
현대 과학은 더욱더 많은 사실들을 채집하고 나열합니다. 그에 따라 자연 현상, 심지어 인간의 심리 현상에까지 합리적-과학적으로 확인되는 팩트들이 훨씬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과학적 - 합리적 사고방식을 정착시켰다는 점입니다.
사실 아무리 많은 사실을 확보하더라도 우리가 인간인 한 매끄러운 팩트의 연속체로서 사건을 파악할 순 없습니다. 사건과 사건 사이는 여전히 틈이 있고, 그 틈은 해설로 메꿔져야 하죠. 이처럼 사실의 틈을 메꾸는 해설을 우리는 '추론'이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추론은 합리적 사고방식에 따라, 논리적 규칙의 제한을 받으며, 부인할 수 없는 팩트들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3. 음모론과 그 특징
앞에서 음모론을 정의했는데, 그 유개념은 '현상에 대한 어떤 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사건, 현상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데, 그 설명에 해당하는 것 중 어떤 것은 음모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설명은 팩트와 추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팩트는 바뀔 것이 없으니 추론 부분에서 갈리는 것이죠. 편의상 음모론 설명에 대비되는 것을 합리적 설명이라고 하자면, 다음과 같이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음모론 = 팩트 + 음모론적 추론
합리적 설명 = 팩트 + 합리적 추론
* 물론 어떤 팩트를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혹은 취사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도 음모론을 규정하겠습니다만, 여기서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는 아주 온건한? 형태의 음모론을 가정합니다.

이제 음모론을 정하기 위해서는 음모론적 추론, 그것이 합리적 추론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답을 말하자면 음모론적 추론은 '추론이 끼어들었다'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팩트들 사이에 삽입되는 추론의 양과 질, 그리고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3-1 음모론적 추론의 특징, 추론의 양
추론의 양이라 함은 추론을 전개하기에 충분한 팩트들이 취합되었느냐의 여부를 가리킵니다. 인간이 고도로 발전시킨 패턴 인식의 도움을 받아도, 저기에 어떤 얼굴이 있다는 결론을 내기 위해 최소한 점 두개와 선 하나가 필요합니다. ' _ '
물론 ' _ ' 이것이 어떤 도형의 일부인지, 우연히 세 개의 점과 선이 흩뿌려진 결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도형에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 혹은 둥근 윤곽이 있다는 사실, 콧구멍이 있다는 사실 등 점점 더 많은 팩트를 기초로 할 수록 추론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부분은 줄어들겠죠.
반대로 팩트의 수가 어느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추론이라기 보다는 상상에 가까운 작업이 될 겁니다. 이 경우 많은 가정 위에 성립되는 추론의 정확성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즉, 기본적으로 어떤 설명이 제시하고 있는 팩트의 수는 대체로 설명의 신뢰성과 비례하는데, 이는 그 이론 스스로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자신이 가늠할 수 있는 신뢰도에 비해 현격히 높은 수준의 확정을 밀고 나가는 것은 일단 음모론적이라고 봐야 겠죠.

3-2. 음모론적 추론의 특징 - 추론의 양
추론의 양보다 더 중요한 건 질입니다. 추론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드러난 이 팩트와 저 팩트를 듣기좋게 연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추론이 사실일 경우 발생하는 현상들을 추정해보고, 이것이 무리없이 설명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선관위가 은밀한 세력에 의해 포섭되어 불법적인 투표소 변경을 했다.'라는 추론의 경우, 이를 사실로 가정하면 그 은밀한 세력은 수백 곳의 읍면동 선관위라는 점조직에 조직원을 침투시킨 거대한 조직일 것입니다. (이는 투표소 변경 결정을 읍면동 선관위에서 담당한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조직은 극악무도한 마음을 먹고 300여 곳의 읍면동 선관위를 포섭하여 겨우 다른 선거와 비슷한 수준의 투표소 변경을 감행합니다. 게다가 최소 300여 명의 읍면동 선관위 공무원들은 일사분란하게 그에 따랐고 아직까지 양심선언 한명 안합니다. 저 추론을 사실이라고 인정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마구 나타나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정상적으로 해명하지 못한 채 진실이라고 밀고 나가는 것은 음모론입니다.

다른 예를 들면 '은밀한 검은 조직의 포섭에 의해 선관위 전산실 직원이 포섭되어 내부에서 투표소 조회 서비스를 막았다'는 추론을 봅시다. 서버 조작의 경우 선관위 전산실 직원을 대부분 매수하여 일사분란하게 작전을 수행하게 하면서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고 일부는 정상 서비스가 되게 하면서 일부만 에러를 내게 하는 복잡계 컴퓨팅을 시도합니다. 모 교수가 입증했듯이 코드 몇줄로 가능한데 선을 뺐다 꼽았다 라우터에 에러를 일으키고 하면서요. 더우기 전체적으로 이 계획은 아침 시간대 투표율과 변경된 투표소 등을 감안해보면, 아주 많이 잡아봐야 겨우 몇천표 얻자고 그 거대한 계획을 발동시켰다는 얘기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투표소 조작조- 선관위 서버조 - 디도스 훼이크조로 이루어진 거대한 음모를 상정하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너무나 많이 발생합니다.
*물론 설명할 수 있기는 합니다. 읍면동 선관위 공무원들은 모두 한나라당 골수 추종자들이고, 중앙 선관위 전산실 직원들 역시 그러하다. 이 음모를 기획한 사람은 아주 심하게 미쳤으며, 특히 산수를 못한다. ......
이것은 음모론적 추론이 가지고 있는 질적 특징이죠. 어떤 사실을 설명하면 그 설명을 설명하기 위해 더 큰 설명이 필요해지는 것.

4. 확증편향
확증편향이란,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에 따라 사실을 수용하는 능력과 태도가 달라짐을 말합니다. 확증편향 때문에 자신이 지지하는 신념의 증거에 대해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더 잘 찾아내고 더 쉽게 수용하는데, 이것은 무슨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인 듯 합니다. 이 때문에 과학자는 자신의 가설을 반증하는 방식으로 가설을 입증할 것을 권고받습니다.
하여간 확증편향은 음모론이 확산되는 데 큰 도움을 주는데 일단 음모론의 가설 - 이것은 재미는 있습니다 -에 신뢰를 주기 시작하면 그 가설에 맞는 증거만을 보거나, 실제로는 반대 증거인데도 인지과정에서 음모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둔갑시키거나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선관위에서 공개한 로그 분석을 통해 선관위를 통렬히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중 하나는 '로그를 분석해보니 6시~8시에 5천명에게 10만 페이지를 정상 서비스했다. 정상 서비스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선을 뽑았냐."라는 질타가 있죠. 이에 대한 기술적 논쟁은 다른 수준에서 다뤄야 하는 문제고, 재미있는 것은 '선관위가 심각한 잘못을 했다는 결론'에 주목하여 이 주장을 '선관위에서 조직적으로 서비스를 못하게 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원래 주장은 '6시~8시에 서비스를 차단' 하는 게 선관위의 목적이라는 거죠.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 말이 자기 주장을 입증하는지 반증하는지 판단력을 상실한 겁니다.
최근에 나오는 증거들에 이리흥분 저리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증거랍시고 내놓는 게 다들 이모양입니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좁은 시야를 가지고 '기술적으로는 가능'함을 이유로 뻘 소리를 하기도 하고요.

.... 이래선 안되겠죠.

2012년 3월 4일 일요일

아래 반론에 대한 반론에 대한 재반론

우선 사소한 변명하자면 페미니즘 학습 여부는 ‘학문적으로 심도있게 연구한 전문가는 전혀 아니지만’ 부분을 제가 오독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는 게 별로 없는 데다 글재주가 없다보니 쉽고 간결한 글을 잘 못써요. 그걸 의식하고 오해를 줄이려다보면 글이 중언부언 길어지기도 하고. 이 부분은 제 능력의 한계이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볼 때는 ‘여성이 약자여서 여성주의가 힘이 세다’는 것은 오해를 살 수 있을만큼 단순화된 표현이 아니라, 모종의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오해는 아마도 현재 여성이 사회적 약자임을 안다는 것이 바로 ‘여성주의’라고 단순화 한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그건 그냥 사실에 대한 인지일 뿐이죠. 말씀하신 대로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고 그래서 [사실인지 = 여성주의]라는 가정에서는 여성주의가 힘이 셀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정도로 추상화된 여성주의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성주의자들은 어떤 특정한 개인이고, 어떤 특정한 주장과 행동을 하는 ‘그 여성주의자’ 혹은 ‘이 여성주의자’이겠죠. 그리고 이들은 약합니다.
(참고로 이정도까지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이 인지되고 있는 현실은 실제로 존재해왔던 ‘이’, ‘저’ 여성주의자들의 성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문열씨의 언급을 보면, 예컨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진정한 페미니즘’이 있고, 나는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이런 여성주의 혹은 저런 여성주의는 건강하지 않고, 나는 나의 방식으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알리고자 했을 뿐이라는 것이요.
하지만 제가 감히 말하자면, 이문열씨는 그 전에도 앞으로도 ‘진정한 페미니즘’을 구경할 수 없을 겁니다. 현실에는 ‘이런 페미니즘’이나 ‘저런 페미니즘’이 있을 뿐 ‘진정한 페미니즘’은 없을테니까요. 이로써 이문열씨는 여성이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여러 페미니즘을 비판할 뿐 아니라 다양한 마초적 논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여성주의의 변종’으로 포장할 수 있게 됩니다.

제 생각에는 올바른 표현이 되려면 이렇게 수정하셔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여성은 사회적으로 약자다, 따라서 '진정한?' 여성주의자는 힘이 세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주의자는 여전히 약자다.]

다음은 김어준 건에 대한 겁니다. 제가 문제로 파악하는 부분과 조금 상황 인식이 다르신 듯 합니다.
저는 김어준이 종아리를 쳐다봤다고 해서 잠재적 성폭력범이라고 규탄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비키니 사진을 보고 어떻게 하고 그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논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김어준 자신이 ‘불쾌하실 수 있다’고 했거든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글들이 많으니 굳이 논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문제삼는 건 그 이후의 대응입니다.

제가 보기에 사과를 하지 않는 이유로 김어준이 내세운 논리는 대충 이런 겁니다.
1. 진정한?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여성들은 자기 몸으로 시위를 거침없이 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해 불쾌해하는 건 여성주의적이지 않다.
2. 그리고 남성은 원래 여자 벗은 몸을 보면 즐겁기 때문에, 굳이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낡은 진보의 쓸데없는 도덕주의이며 버려야 한다.)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며 그냥 즐거워하면 된다.

그리고 오빠페미니즘에서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진정한 진보(여성)주의자는 순결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순결 굳이 생각하지 마라] 제가 오빠페미니즘을 거론한 이유는 김어준이 그만큼 잡놈이라는 게 아니라, 이 논리가 닮았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에 대해서도요.

‘욕망의 분출’이라는 표현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마 어떤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어떤 성적 언사가 ‘남성이 여성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하는 농담이겠죠.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코피 운운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성차별적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죠. 그 욕망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기왕에 ‘불쾌함을 표명하는 여성’들이 있는 바에야 잘못을 시인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 차이를 ‘이상사회’를 들어, 또는 자신이 ‘진보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정당화하는 것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대단히 위험합니다. (이와 동일한 논리들이 여권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위의 댓글에도 적었듯이, 저는 여성주의고 뭐고를 떠나서도 정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불쾌하시면 사과해야지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여기에 어떤 이유를 대서 – 나는 이런 저런 진보적이므로, 너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므로 – 사과 안한다는 게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의아스러울 뿐입니다.

호봉 인정의 예나 제가 생각하는 제가 생각하는 ‘진정으로 여성주의에 공감하는 남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긴 글이 필요할 듯 해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여성이 불쾌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불쾌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에게 다른 대의명분이 있으니 사과는 할 수 없다]는 사람은 만약 여성에 도움이 된다면 ‘그나마’ 도움이 되는 정도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