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4일 금요일

대한민국의 괴이한 민주주의

2007년 대선이 끝난 직후부터 국개론이라는 얘기가 떠돌았었다.
풀어쓰기에는 좀 민망한 '국민이 개새끼'라는 얘기인데,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이 절대 다수인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오직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이 분명한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에게 투표하는 가난한 국민들이 제 목을 조르는 바보들이라는 욕이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고, 대선 후의 허탈감이랄까 분노에 빠졌을 당시에 진보나 민주(?) 성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상당히 호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상당히 위험하고 혐오감이 들 수 있는 얘기인데도, 최소한 그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국민들을 옹호(?)하는 얘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이야 한풀 꺾였지만, 2010년 현재도 정치 얘기를 할 때 간간히 거론되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좀 웃기는 사실은, 그 국개론을 극렬히 주장하는 일군의 사람들 중에 이명박의 상대 후보였던 정동영에 대해 무효표를 찍었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의 낙선을 위해 정동영을 찍었던 사람들도 이 무효표를 던진 사람들의 '진정성'에 깊이 공감할 뿐, 이명박을 도왔다고 문제제기 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결국 자신들은 너무 싫어서 찍지 않았지만, 그 사람을 당선시키지 못한 국민들은 개새끼라는 얘기다.
좀 이상하지만, 여기까지는 논리적으로는 납득할 수 있다.
요컨대 이명박이 당선된 이유는 정동영을 찍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명박을 많이 찍었기 때문이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들조차 찍기에 민망한 후보를 내고나서 그 사람이 당선안됐다고 국민들 탓을 하는 것은 상식도 예의도 아니라고 본다.

** 약간 논지에서 벗어나는 얘긴데, 이 국개론을 극렬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두해 전에 있었던 김근태의 국민 노망론인가 하는 비슷한 류의 얘기를 극렬히 비판한 바가 있다. **

다행히 2010년에 치러진 지방선거가 끝난 후에는 국개론 같은 저급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대체로 야권의 승리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국민들의 선택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특히 최대 격전지였던 서울에서 이익투표(계급투표라고 하기는 좀 뭐한) 양상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에 결과를 떠나 개같은 선택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더 손쉽게 시장 선거 낙선의 책임을 떠넘길 상대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
그 상대는 바로 진보신당의 노회찬과 그 지지자들로, 요컨대 알량한 진보의 가치를 지킨답시고 출마해서 표를 갈라먹었기 때문에 한명숙이 낙선되었다는 거다. 그래서 진보신당의 출마와 선거 완주는 오세훈 당선에 일조한 것이고 한나라당의 2중대이며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얘기다.

** 이것을 제대로 얘기하려면 20년 넘게 지속된 케케묵은 비판적 지지론에 대한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그것까지 정리할 능력은 안되고, 간단히 상식 선에서 짚어보고 싶은 게 있다.**

사실 노회찬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노회찬-진보신당의 노선과 한명숙-민주당의 노선이 전혀 다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명분은 반MB라는 시대적 사명을 받들어 좋건 싫건 한명숙에게 표를 밀어주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비난하는 와중에도 정동영을 찍지 않아 MB를 당선시키는데 일조했던 한나라당 2중대이자 민주주의의 적인 자신들 스스로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자기 당 후보인 정동영을 차마 찍지 못한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고민한 결과이고, 원래 다른 길을 가던 노회찬이 원래 가던 길을 간 것은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얘기다.

이쯤 되면 이들이 얘기하는 민주주의가 뭔지 뜨악해질 수밖에 없다.

노무현도 유시민도 얘기했듯이, 한나라당과 민주당, 열우당(그 후손인 국참당)의 지향점과 비전은 크게 차이가 없다. 비정규직 문제나 FTA 문제, 파병 문제 등 굵직한 사안에 대해 이들의 비전이나 정치적 행보는 큰 차이가 없었다.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범야권내 개혁 그룹으로 불리는 노무현 유시민 자신의 평가이니 이렇게 말하는 게 문제되지 않으리라 본다.

그런데도 이들이 반MB를 이토록 중요한 가치로, MB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으며 이것을 막아야 한다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MB가 [단지 대선에서 많은 득표를 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국민의 다수로 규정하고 온갖 반대를 정면돌파하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모습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MB를 막기 위해 이들이 내건 것은 [단지 선거에서 확보하고 있는 표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스스로를 국민의 염원으로 규정하고 전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다른 세력 더러 막무가내로 자신을 지지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면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한다.

이것을 과연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낙선의 이유를 분석해 보자.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 그리고 기타 범여권 잡당의 정당 지지를 합치면 46.3% 정도 된다.
그리고 오세훈이 얻은 표는 47.4%.
자유선진당의 고소영 남편이 2%를 얻어 여권을 분열시켰으므로 실제로 오세훈이 범여권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외에도 3% 정도의 표를 더 얻었다고 볼 수 있다.
표 수로는 정당지지 합산 190만표 정도, 오세훈 208만 표를 얻었다.

민주당과 국참당, 민노당의 정당 지지를 모두 합치면 49.7. 거의 50%에 육박하는 수치가 된다.
그리고 한명숙이 얻은 표는 46.8%
표 수로는 3당의 정당지지 합 217만표, 한명숙 206만표 득표.
한명숙은 반MB연대를 주장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11만표 정도를 득표하지 못했다.

이쯤이면 진보신당을 끌어넣지 않아도 패배의 이유를 알만 하다.
한명숙 후보는 자기편이라고 모여있는 정당지지로 모여있는 표조차 자신의 표로 흡수하지 못했고, 그 표를 오세훈이 가져간 것이다.
참고로 진보신당의 경우도 정당지지 표가 노회찬 득표보다 2만표 정도 많다. 진보신당을 지지했지만 시장은 한명숙에게 찍은 표가 2만 정도 더 있다는 얘기. 따라서 한명숙이 못먹고 흘린 표는 11만표가 아니라 13만표 쯤 되나보다.

** 사실 투표수 분석하고 누가 몇표를 얻었네 어디서 뭘 못얻었네 하는 것은 이 논란에서 무의미한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출마를 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투표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권리이다. 적어도 민주주의에 아주 개차반인 이명박조차 막을 수 없는 권리에 속한다. 자칭 민주 운운하면서 이것을 막겠다는 것들이 정신이 이상한 놈들이다. 수치는 다만 이번 선거에서 이렇게 되었으니 보고 좀 생각하라고 참고로 제시한 것이고, 설령 노회찬이 한명숙 표를 강제로 뺏어와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한명숙이 낙선했다고 해도 그것이 노회찬을 비난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

왜 패배했냐고?
득표를 못했으니 패배했지. 그것이 답이다. 선거에 지는 이유가 다른 게 있나?
굳이 외부에서 이유를 찾자면 오세훈이 득표를 많이 했기 때문에 진 것이다. 이건 강남 3구 구민들에게 가서 따져라. 다만 적어도 그 구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냉철히 계산해서 투표한 것이므로 국개는 아니다.

인터넷에서 이런 사람도 봤다.
정당표가 비등비등했고, 오세훈이 시장 프리미엄을 받아 더 많이 득표한 거란다. 시장 프리미엄을 받을 것은 기정 사실이므로, 자기표 간수를 못했다는 비판은 성립되지 않고 결국 노회찬이 갈라먹어서 떨어졌다고 .....
이 사람의 지능은 머리나쁜 국개파 중에서도 특히 나빴나보다.
MB 심판 국민 염원 열망론의 근거는 MB와 오세훈이 대통령질 시장질을 정말 너무나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이 바꾸자는 열망이 용솟음친다는 얘기 아니었나? 그런 오세훈이 현직 시장 잘했다고 주는 프리미엄을 받는게 기정 사실?? ㅎㅎ

그리고 근본적으로 국민들이 MB와 오세훈을 심판하는 열망이 막 주체할 수 없이 솟구쳐 오르는데, 왜 노회찬의 출마와 완주가 문제가 되는가? 그 열망을 그러모아 자기 표로 조직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노회찬이 출마하면 한명숙이 그 시민들의 마음을 모으는데 무슨 장애가 생기나? 노회찬더러 사퇴하라 압박하는 명분이 시민들의 열망이 자기 쪽에 있다는거 였는데.
만약 시민들의 마음이 노회찬한테 쏠려 한명숙이 그 표를 받을 수 없다고 판단되면 한명숙 스스로 사퇴하면 되는 일이다. 그것이 자기들이 말하는 대의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하여간, 상식적으로 보든 결과로 보든 나는 노회찬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가 없다.
머리 나쁘고, 최소한의 예의도 못갖춘, 반민주적인 민주투사라니. ...
국민들을 개새끼로 보면서 그 국민들의 염원이라며 제갈길 가고 있는 엄한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정작 자기들 표조차 간수를 못해서 떨어져 놓고 나서 남 탓을 하고 있다..
이게 지금 한국 사회의 반MB를 통해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작자들의 행태다.
(물론, 자칭 민주개혁 진영의 지지자들이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 중 점잖은 사람들은 이런 극렬 빠들을 곤란해 하겠지.)

문제는 이런 천박한 민주주의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야권 개혁파라는, 그나마 보수 야당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개혁적이라는 사람들이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희망이요 진리요 시대적 요구를 껴안고 걸어가는 고독한 순교자쯤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 괴악한 민주주의자들의 뻘짓이 갈수록 도를 넘는 것 같은데, 너무 치달려 곧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은 아닐까 하면서 희망을 가져본다.


만약 오세훈이 졌다면 고소영 남편에게 이정도 수준의 린치가 가해질까? 개인적으로 이것이 참 궁금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칭 민주주의자들의 민주적 문화가 재벌독재당의 그것만도 못하다는 얘기가 되는데, 참 웃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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