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9일 월요일

곽노현 교육감 “박명기 교수에 선의로 2억원 건넸다”

곽노현 교육감은 28일 “박명기 서율교대 교수에게 선의로 총 2억원의 돈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곽 교육감은 이날 오후 서울시교육청에서 검찰 수사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갖고 “교육감 취임 이후 박 교수의 어려운 처지를 외면할 수 없어 선의의 지원을 했을 뿐”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 (중략) ...

돈의 전달방식과 관련해서는 ”드러나게 지원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어 선거와 무관한, 저와 가장 친한 친구를 통했다.”고 설명했다.

곽 교육감은 “박 후보와 철저하게 반칙 없는 후보단일화를 이뤄냈고 취임 이후 선거와 무관하게 그분의 딱한 사정을 보고 선의의 지원을 했다”며 “이것을 후보직 매수 행위로 봐야 하느냐.”고 주장했다.

그는 “박 교수와 후보 단일화는 민주진보 진영의 중재와 박 교수의 결단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대가에 관한 어떤 약속도 없었다.”고 말했다.

검찰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곽 교육감은 “공권력은 명확한 검을 휘둘러야 한다. 사람을 죽이는 검이 아니라 살리는 검을 사용해야 한다.”면서 “이것이 범죄인지 아닌지, 부당한지 아닌지, 부끄러운지 아닌지는 사법당국과 국민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말했다. 이어 “왜 나에게 항상적인 감시가 따르나. 이른바 진보교육감, 개혁 성향 인물이라는 이유일 것”이라면서 “그런 점에서 이번 사건도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표적수사로 봐도 틀리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국철 선의로 신재민에게 10억 줬다.
신재민(54·구속기소)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뇌물공여)로 구속기소된 이국철(50) SLS그룹 회장이 법정에서 "순수한 선의와 호의로 도움을 준 것일 뿐 청탁 명목이 아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원범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이씨의 변호인은 "10년 전 신 전 차관이 기자로 있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 그때부터 좋아하는 친구에게 도움을 준다는 취지에서 돈을 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신 전 차관이 공직에 나간 이후에도 돈을 준 것은 조심스럽지 못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하지만 부담을 주는 어떤 청탁도 하지 않았다"며 "다만 아나운서 조카와 관련해 청탁한 것이 공소사실에 있지만 개인적, 인간적 차원의 동정심에서 친구에게 한 것으로 금품과 대가관계는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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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검이란 이런 것. 나는 선의 너는 악의.. 는 더 나쁘고.

한나라당 돈봉투 사태 ...

한나라당이 영악하긴 한가 보다.
민주당이야 정책이 진보도 아니고, 순수한 것도 아니고, 한나라당만큼 노회하지도 않으니 상대가 안되는 게 당연하네.

우선 정치인 기사는 부고만 아니면 뭐가 됐든 인구에 회자되는 게 좋다.
네거티브의 안좋은 점과도 일맥상통하는데, 네거티브를 하려면 상대를 언급해야 하고 언급하면 선전이 된다. 이명박 선거 때 이미 뼈저리게 느꼈던 것..
결국 한나라당은 시련도 있고 실수도 있고 잘못도 있고 어쩌고 하지만, 결국 존재하는 건 한나라..
약간의 쇄신 이미지 심기에 성공한다면 그 이전의 잘못은 쓱 닦아버릴 수 있게 된다.

최대한 일찍 김을 빼고 가는 게 좋다.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고, 총선 전에 매 한 번 자청해서 맞고 털고 넘어가는 거다.
봐라 우린 맞을 거 다 맞고 털었다. 이거지.
일종의 고육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국회의장 카드를 버릴 정도면 결단력도 있고 과감하다.

여기에 야당 물타기까지 성공.
민주당에서도 돈봉투로 난리가 났으니 한나라당 만의 부패가 아니라 한국의 정치 수준, 국민적 수준으로 면피할 방법이 생긴 거다. 이건 어찌보면 '사실'이기도 해서 좀 그렇다. '우리 편'인 민주당의 개삽질에 안타까워할 우리편론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걔들은 원래 그런데 우리편 어쩌고 하는 게 더 문제인 거고..

정봉주 최후 진술과 정봉주 구속 논쟁


존경하는 재판장님!

지난 2개월간 BBK와 관련되어 재판을 받으면서 참으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이 재판은 불행한 재판입니다.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법정으로 가져온 것 자체가 불행한 일입니다. 국민의 명령을 받는, 국민의 대의기관이며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의 정상적인 정치 활동을 법으로 판단하기 위해 이 법정으로 가져온 것 자체가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답답하긴 하지만 제 심경을 밝히고자 합니다.

사회가 투명해야 하고 국가 관리와 지도자는 정직해야 한다,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보여준 대목입니다. 국가와 사회가 투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를 지도하는 최고 통치자가 도덕적으로 깨끗해야 하고 어떠한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국가 사회가 정직하고 투명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뽑을 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잣대가 바로 도덕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뽑을 때 도덕성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하는 필요성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BBK 사건은 바로 이렇게 시작한 것입니다.

검찰의 주장대로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갖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네거티브 캠페인을 한 것이 아닙니다. BBK는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죄질이 나쁜 추악한 범죄로 취급되고 있는 주가조작, 횡령 사기 사건입니다. 이 BBK에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주가조작과 횡령사건의 중심에 있던 BBK와 관련해서는 대통령 후보가 적어도 동업자이거나 아니면 실질적 소유자였을 것이라고 하는 의혹을 국민 대다수가 갖고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번 BBK 관련 국회의원 정봉주 기소 사건은 우리 정치 역사의 한 면을 장식할 중대한 사건이 될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김경준의 BBK는 법의 판결을 받고 있지만 ‘진실 게임 BBK’는 역사의 흐름 속에 숙제로 던져졌습니다. 국민이 진실에 목말라하고 있을 때 국민의 대의기관으로서 국회의원의 정상적인 정치적 행위에 대한 하나의 판례를 만드는 중요한 재판이 될 것입니다.

검찰은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편파 수사를 했거나 보복성 기소를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만들고 있습니다. 거의 같은 내용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내부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기소는커녕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이들의 편파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 정봉주를 기소한 것은 철저하게 보복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만들고 있습니다. 보복은 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했던 정치는 이처럼 보복 위에 피는 추한 꽃이 아닙니다. 정치는 자신의 아비인 사도세자를 죽인 반대파들도 아침저녁으로 웃으면서 얼굴을 맞대야 했던 정조의 운명처럼, 그러한 관용과 포용 위에 피는 화합의 꽃입니다. 정치가 무한 화합과 무한 관용 위에 설 때 국민 입가에 웃음이 돌게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진정으로 법이 살아 있음을, 정의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믿고 싶습니다. 국민의 명령을 받아 대통령 후보의 검증이라는 지극히 정당한 정치적 활동에 대해 그것도 철저하게 자료에 근거했던 가장 정상적인 정치 활동을 형사법이라는 이름으로 족쇄를 채우려 한다면 사회의 가장 높은 경쟁력인 도덕성은 어떻게 찾겠습니까? 국회의원의 도덕성 검증을 위한 정치적 표현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 경쟁력인 투명성, 정직성은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존경하는 재판장님,

국가의 도덕성을 높이기 위해서 지도자의 도덕성을 검증하려 했던,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도덕성과 정직성, 투명성을 높이려 했던 젊은 정치인의 진심이, 그 열정이 꺾이지 않도록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덕성 위에, 투명성 위에, 정직함 위에 우리 사회의 미래가 있고 더 힘찬 내일이 있다는 믿음이 꺾이질 않도록 부디 현명한 판단을 해주시길 다시 한 번 간곡히 요청 드리겠습니다.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정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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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아래 판결문 포스팅에도 있지만, 최후 진술의 첫 단락에 대해 완전히 동의한다.

이 재판은 불행한 재판이고, 한국의 사법-정치-시민사회가 낙후되어있음을 보여 준다.

이 정도의 정치적 행위는 - 엄격하게는 법조문과 다소 상충될 수 있어도 - 시민 사회 내지 정치적 영역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문제는 다음이다.

[검찰의 주장대로 있지도 않은 사실을 갖고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네거티브 캠페인을 한 것이 아닙니다. ......던 BBK와 관련해서는 대통령 후보가 적어도 동업자이거나 아니면 실질적 소유자였을 것이라고 하는 의혹을 국민 대다수가 갖고 있었습니다.]

- 정봉주가 가진 것은 의혹이다. 적어도 의혹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거의 같은 내용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내부의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기소는커녕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이들의 편파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나라당 의원들의 주장이라는 것은 한나라당 대선 후보 당내 경선 때 박근혜 측에서 제기한 것이다.

문제는 이 한나라당 의원들의 의혹 주장이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명박은 당연히 부인했고,


이 시점에서 '아무리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한나라당 의원들이 제기한 것을 재탕한다는 것은 '이미 부인된, 더이상 증명할 길 없는' 의혹의 리바이벌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 필요한 것은 더 구체적인, 지난번에는 증명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증명할 수 있는, 사실적 증거이다. (의심가는 정황이 아니고 말이다.)


사실 검찰 진술에서 정봉주 스스로 '이명박이 BBK의 소유주로 밝혀진다한들, 이명박이 주가 조작에 관여했다고 연결시키기 힘들다'고 진술했다. 결국 증명할 길 없는 의혹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아래 포스팅 판결문에도 있지만, 정봉주 정도의 학력, 지위 등을 감안하여 볼 때 '본인 스스로는 사실로 확신하였다'고 주장하더라도 (주장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이 의혹 제기가 과연 한나라당 경선 당시의 리바이벌 이상으로 증명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면' 의도적 허위사실 제기가 성립한다.


그리고 나서 (아마 위 사실에서 밀릴 것을 감안한) 정봉주가 다투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BBK 의혹 제기가 정상적 정치 활동, 지도자에 대한 도덕성 검증 활동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법원은 상대 후보의 낙선을 위한 정략적 기동으로 판단한 것 같다. 이것은 사실 당시의 정황이나 '스나이퍼'를 자처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의혹 - 정말 사실일 것 같지만 증명할 길이 없는, 따라서 허위일 수 있음을 인지한 의혹 - 을 정략적으로 제기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명박이 주가 조작에 관여했다는 확고부동한 - 적어도 계좌상 돈의 흐름이라든지 하는 - 증거를 갖추지 못한 채 박근혜의 이론에 몇몇 정황 증거를 덧붙여 BBK를 가지고 '저격'하려 했던 것은 안타깝지만 무리였다고 할 수 있겠다.


결론 계속 반복이지만, 이 정치활동이 법정에 선다는 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정법은 실정법이다. 법안 개정 논의를 하고, 좀더 유연하게 적용해 줄 것을 바랄 수 있지만 현재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에 걸리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나꼼수 애청자들이 한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재판에 대해 부당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크게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 혹 허위 사실일 지라도 - 이러한 정치 활동을 법으로 구속하면 안된다는 측이다. 여러번 밝혔지만, 일리가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는 BBK는 모두 사실로 증명했지만, 검찰과 법원이 손잡고 사실을 왜곡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앞의 정치 활동 허용 측면에서 부당한 판결이라고 보는 법조인도 이 부분은 "고지식하게 구식의 판례를 적용했을 뿐" 과도하거나 왜곡이라고 하진 않는다.


이 점은 구분하고 넘어가자.

2012년 1월 8일 일요일

유시민 돈봉투 발언

적전분열은 사형이라면서 '우리편' 깠다고 흥분할 사람들도 좀 있을 것 같은데, 의외로 조용합니다.

유시민도 '우리편'이라서 그런가?

아무튼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2012년 1월 7일 토요일

정봉주 판결문




9쪽 짜리로, 이 부분이 핵심 쟁점이라고 생각된다.

가카가 김경준과 공모하여 주가조작 및 횡령을 했다.
가카가 다스의 소유주이다.

라는 정봉주 전 의원의 주장에
1. 구체적 증거가 있느냐.
- 아쉽지만 구체적 증거는 없었다. 하다못해 주진우 기자가 그토록 원했던 에리카 누나와의 밀월 사진도 ..

2. 진실한지 확인할 시간과 물리적 여유가 있었느냐.
-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당시 당력을 기울여 위 주장의 확고한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결국 찾지 못했다.

3. 어떠한 소문을 듣고 그 진실성에 강한 의문을 품고서도 감히 공표한 경우에 해당되느냐
- 정봉주 전 의원은 아마도 진실하다고 확신하였을 것이다.
- 확신 여부는 상당히 주관적이므로, 진실의 근거로 제출하는 증거(검찰이 허위라고 한)에 대해 경력, 지위, 공표 경위, 시점 등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한다고 밝히고 있다.

정봉주 전 의원의 최후 진술처럼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법정으로 가져 온 것 자체가 불행한 일입니다. 국민의 명령을 받는, 국민의 대의 기관이며 헌법 기관인 국회의원의 정상적인 정치 활동을 법으로 판단하기 위해 이 법정으로 가져온 것 자체가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이 재판은 열린 것 자체가 불행한 일인 것이 맞다.

그러나 역시 정봉주 전 의원이 최후 진술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미 그 전부터 한나라당 내부에서 제기되었던 - 그러나 그 때도 증명되지 않았던 - 의혹을

[저는 이러한 (국회에서 발표할 경우 주어지는 국회의원 면책) 특권을 포기하고 기자회견이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기자 회견을 하면 제가 하는 발언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기자회견을 택한 것은 검증의 책임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근거 없는 허위 사실 날조라고 하는 정치적 공방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각오가 우선되었기 때문입니다. ]

책임을 져야하는 기자회견 방식으로 발표하였고, - 그 전의 박근혜와 마찬가지로 -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하는 게 문제다. 성공했다면 좋았을 것을 .....

아마도 배심원 심판이라면 - 이런 경우에도 열리는 지 모르겠지만 - 정봉주에게 승산이 더 높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현재의 법체계 하에서 판사의 판결을 무턱대고 나무라기만도 어렵지 않은가 싶다. 법 자체를 바꾸던지..

진정성 ...

말 자체가 나쁜 의미는 아닐진대 정말 보기 싫은 말이 되었다.

벌써 한 7-8년 되었으니 지금 쓰긴 새삼스럽지만, 요즘에 다시 진정성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게다가 요즘은 '진정성'이라는 게 공식 용어가 되어버렸다. 의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부 당국은 대북 관계에 진정성을 보여라라든지 박근혜 비대위장에게 쇄신의 진정성을 느꼈다느니 하는 식으로 '진정성' 저작권자들의 반대편에서도 쓰고 있으니까.
- 하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진정성'에 관한 한 둘은 거의 차이가 없으니까.

유시민느님의 말을 들어보자.
서울대학교 강연 中.
'진정성은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타당한 것인가 타당치 못한 것인가 이것뿐이다.'
참으로 훌륭한 말씀이다. 역시 똑똑하긴 똑똑하구나 .... 라기보다 이게 당연한 거지.

참고로 진정성은 표준 국어 단어가 아니다.
아마 다음 두 단어 중 하나에 성질을 의미하는 性 자를 붙여서 만들어진 단어 같다.
진정02(眞正) 부사거짓이 없이 참으로. ≒진성03(眞成)ㆍ진정히.
진정05(眞情) 명사「1」참되고 애틋한 정이나 마음. 「2」참된 사정.
단어적 의미로 보자면 '참된 사정'에 가까울 것 같긴 한데, 사실 '마음의 상태'라는 위 언명과 결부시켜 보면 '말하거나 행하는 자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에 대한 참된 사정' 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사실은 '참된'이라기보다는 진심 혹은 본심, 내지는 속사정 정도의 의미가 어울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의미는 좋은 편(?)에 속한다. 성선설을 믿는 한 '진심'은 좋은 것이니까. 특히 정치적이나 사회적인 문제에서 '진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진정성 현상이 나타난 게 사실 노무현 대선 시기부터이기 때문에 진정성 얘기를 하자면 친노 지지세력(세칭 노빠)들이 거론될 수 밖에 없다. 대표적인 분이 지금은 좀 쇠락한 정치인 유시민인데.
예컨데 유시민 지지자들은 '유시민에게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라고 하고, 노빠 출신 중 비교적 유시민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유시민의 행적에서 진정성을 볼 수 없다.'라고 한다. 간단히 검색을 해보니, 문성근의 진정성을 배워라 라는 충고, 최근 쇠락은 진정성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충고 등이 있다. 아마 최근 통합 과정에서 독자적(이라기보다 정략적) 모습을 많이 보여서 비판적 의견이 많이 생겼나보다.
요컨대 '너 개인의 입지 말고 (문성근씨처럼) 우리편으로서의 우직한 충성도를 증명해라.' 라는 것.

철지난 얘기지만, 잊을 수 없는 얘기라 언급하자면, "파병은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만 노무현의 진정성을 고려할 때 그 안에 복잡한 국제 정세와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어 있으므로 지지해야 한다"라는 식의 논리가 있었다.
간단히 쓰면 이렇다. 우리편이니까 반대하는 일도 지지하자.

'진정성'이 실제로 사용될 때의 의미는 '우리편'인지 '적'인지를 구분할 때 쓰이는 것이다.
'진정성'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진영논리의 핵심 키워드인 셈이다.
진영논리의 확산과 함께 - 이것은 '빠'의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 사건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우리편인가?가 판단의 기준이 되면서 소위 개혁적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논제가 삼천포로 빠지게 되었다.
파병이 옳은가 그른가가 논점이 되지 않고, '우리 정권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가 논점로
(사실 이 부분에서 앞서 서울대 강연을 하셨던 유시민씨도 자유롭지 않다.)
경쟁했었던 (과거형임) 후보에게 2억을 준 사실이 적절한가 아닌가가 논제가 되지 않고 '우리편인가 아닌가?'가 논점으로 변한다.

이러한 현상이 횡행하다보니 이제는 '진정성이 있는가 없는가'가 다른 가치판단에 우선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나꼼수의 욕에도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 욕은 비판할 수 없다.' 라는 식이다.
이 정도라면 애교지만, '우리편의 치부를 먼저 공격하는 입진보는 한나라당의 꼭두각시'라는 식까지 나가게 되면 해악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입진보가 논리적으로 맞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라는 심경고백까지 나오고 보면, 이 진정성이라는 게 정신건강에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 수 있다.
방금 본 트윗에 이런 게 있다. "정의는 양심이고 상식은 논리입니다. ..... 상식이 바로 선다고 정의가 승리하는건 아니지 않는지요." ... 답이 없다.

정말 문제는 이들이 비교적 사회에서 정의감을 가지고 정치에 관심이 많으며 한 똑똑한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거다. 국개론을 정말 싫어하는데, 이런 현상을 보면 꼭 부정할 것만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유시민씨 말대로 진정성의 원래 의미는 마음의 상태일 뿐이다. 나꼼수의 진정성이 크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진정성이 크다는 건 열정적이라는 것이고, 사람이라는 동물은 열정적인 대상에 쉽게 동화되고 자기의 열정을 끄집어 내기도 한다. 그러나 열정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 꼭 '옳으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몹시 높다. 그래서 항상 반성하고 경계해야 하는 법이다.

이들은 아마 열정적으로 진보적(?), 상식적, 진짜보수적(?) 개혁을 원하고 있을텐데, 열정의 보람은 크게 찾기 어려울 듯 하다. 최대치는 아마 한나라당을 이기는 그 한순간의 만족감으로 끝날 것 같다. - 이것도 내가 보기에는 사실 장담하기 어렵다. 다만, 진보진영이 진영논리에 완전히 먹혀버린 직후이므로 그 여파로 가능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

고전 한토막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한 사내는, 튼튼한 천리마(千里馬)가 이끄는 마차에 몸을 싣고, 날 듯 한 기세로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도중 주막에서 잠간 쉬고 있는데, 인근의 한 백성이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으니, ‘나는 지금 저 멀리 초(楚)나라로 가는 길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백성은 감작 놀라 ‘손님 큰일 났군요. 초나라로 가려면 이 길 반대편으로 가야하는데, 지금이라도 마차를 돌려 가셔야 합니다.’하고 이러주었습니다.

이에 나그네는 거만을 떨면서 장담하기를 ‘걱정할 것 없소이다. 내 마차는 튼튼하고 말은 천리마니 미리 겁낼 것 없을 것이요’하고 일어서려는데, 그 백성은 ‘아니지요. 아무리 튼튼한 마차를 천리마가 끈다고 한들, 초나라로 가는 손님이 반대 방향으로 가면, 길은 점점 멀어질 테인데, 괜찮겠습니까.’하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그네는 ‘말씀은 고맙지만, 나에게는 부모가 마련해준 여비도 든든하고, 시간도 넉넉하니 염려 없습니다, 그럼!!!’하고 역시 반대방향으로 마차를 달려서 떠났습니다.

2011년 5월 17일 화요일

광주 공수부대원

24년간 정신병 앓은 '제3 공수여단원'
<특별기고> '박하사탕'을 아직 곱게 간직하고 있는 내친구 김동관
2006-05-12 09: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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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는 14일 오후 11시30분 방영되는 MBC의 '5.18 특집기획 다큐' <내친구 김동관>에 출연한 필자가 지난 3월중순부터 4월말까지 동행 촬영한 후 쓴 특별기고다.

특집 다큐의 주인공 김동관씨는 1980년 5월20일 오전 7시 제3공수여단의 일원으로 전남대에 투입돼 진압작전에 참여했다. 김씨는 그후 24년여 동안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수도권에 있는 정신병원을 전전하다 현재 수원 아주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는 1980년 광주에서 그가 무엇을 보고 행하고 느꼈는지를 사건 발생 26년만에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필자는 이 다큐에 출연하는 주인공 김동관씨의 대학입학 동기로서 지난 1977년이후 지금까지 30년간 주인공을 곁에서 계속 지켜본 절친한 친구 중 한명이다. 이제까지 광주시민, 민주열사 등 승자의 시각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이 조명되어 왔다. 하지만 진압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공수부대원이 광주 진압후 얼마나 악몽같은 삶을 살아왔는가를 통해 광주항쟁의 본질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내 친구 김동관

어김없이 찬란한 5월이 또 왔다. 5월 광주민중항쟁, 그러나 그것은 아직 미완성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쟁취한 시민혁명이건만 그 속엔 텅 빈 구석이 넓기만 하다. 아직 공허함이다.

나에게는 친구가 있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7년 3월 고려대학교 정경대학에 입학한 동기생이다. 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럴 때 우리는 조국통일과 민주주의에 대해 고뇌했다. 그 이름은 김동관.

그 당시 고대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고전연구회라는 이념 서클이 있었다. 동관이와 나는 이 서클에 가입했다. 지금은 우습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칠흙같이 암울한 독재정권 시절 학생운동은 투쟁의 방법론을 놓고 치열한 내홍을 겪곤 했다. 학내 시위가 잇따랐고 비교적 온건론을 편 김동관과 나는 이듬해인 78년에 서클에 이름만 걸쳐 놓는 상태가 됐다.

◀ 대학재학 당시 친구들과 포즈를 취한 김동관. 사진 왼쪽부터 김우진, 김동관, 그리고 필자. ⓒ 황남준


그는 1979년 5월 23일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다. 운동권 경력을 가진 그는 공수부대원으로 차출돼 거여동 제3공수 여단에서 공수 훈련을 받았다.

1979년 9월 초순 서울 송파구 거여동 제3공수 면회실. 이찬영, 김우진, 나(이상 대학동창), 이원호(중학교 동창) 등 네 사람은 동관이 녀석 먹일 닭튀김과 음료수 등을 싸들고 면회를 갔다. 우리는 조금 걱정했다. 곱게 커온 녀석이 논산훈련소를 거쳐 험하기로 악명높은 공수훈련까지 잇따라 받았으니 거의 초죽음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녀석은 의기양양한 자세로 우리를 반겼다. 자신이 공수부대원의 우상인 ‘막타워의 왕’이 됐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막타워', 그것은 비행기 낙하훈련을 하는 모형탑을 가리킨다.

"네 번을 제일 먼저 합격하는 사람이 왕이 된다. 막타워의 왕. 그게 나라고. 그러니까 네 번... 아니 다섯 번을 뛰었다. 네번째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너무 자신만만하게 뛰어가지고··· 그래 한 번 더 올라갔어. 그래 뛰니 합격이지 뭐. 그러자 조교가 오더니 군복 다 벗어라 이거야. 그리고 막걸리 한 독을 떡 갖다놓는 거야. 한 주전자 퍼가지고 딱 먹이고.
막타왕이 (특전사) 최고의 영예야. (동료들은) 다 훈련받고 얻어맞고 뺑뺑이 돌고 있는데 막걸리 마시고 있는 거야, 혼자서. 군복 아래 위 다 벗고 군화 끈 다 끄르고, 군용 팬티만 입고 말이야."

그러던 동관이 입대 1년후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발발하자 제3공수여단의 일원으로서 진압군으로 전남대에 투입됐다. 이것이 이 젊은 청년을 절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하는 계기가 될 줄이야.

◀ 공수부대 시절의 동관이. ⓒ김동관


달라진 동관이

5.18광주민주항쟁이 무참히 진압된 직후인 1980년 후반의 일이다. 동관이는 외박과 외출을 나와 학교 근처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길거리에 있는 군인들과 시비가 붙어 곧잘 싸우곤 했다. 주로 동관이가 먼저 말을 붙이고 서로 주먹다짐이 오가는 식이었다. 우리는 녀석의 달라진 모습에 너무 놀라곤 했다. 군대가기 전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러던 중 1981년 여름 어느 일요일 오전. 나는 9월 입영날짜를 받아놓고 서울 도봉구 수유2동 도성암이라는 절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동관이 어머님이 잠시 집에 와서 점심을 같이 했으면 좋겠다고 전화를 주셨다.

청파동에 있는 동관이 집으로 갔다. 동관이는 외박을 나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오후에 귀대 예정이었다. 동관이 아버님이 따로 부르셨다. "동관이가 혼자서 중얼거리고 자주 화를 내고 잠자다 괴성을 지르는 등 무언가 이상하다"는 말씀이셨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어떨까 궁금해서 불렀다는 것이다.

동관이는 나를 반겨하면서도 표정이 밝지 않았다. 대화도중 하느님과 예수님을 가끔 언급하다가 가끔 언성이 높아지는 등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모처럼만에 갈비찜 등 푸짐한 고기음식을 많이 내주셨다. 동관이가 몸이 허해 가끔 헛소리를 하는 것 같으니까 고기를 많이 준비하셨단다.

"제대를 앞두고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서 그럴수도 있겠지요"라는 말로 위로의 말씀을 건넸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관이 부모님이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걱정이 되길래 나를 부르셨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당시 정신병이라는 것은 패가망신하는 병으로 인식된 만큼 "내 아들이 그런 병에 걸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동관이 어머님은 회고하신다.

동관이는 1981년 11월5일 제대했다. 그리고 얼마 뒤인 1982년 봄 정신분열증으로 고대 근처 베드루 병원에 한달간 입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인생의 절반이 되는 24년동안 전국의 정신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병명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 등 정신분열증이었다.

광주의 참극, '특전사의 무차별 학살'

도대체 1980년 5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20여년간 필자 등 몇몇 지기들에게만 파편적으로 당시 참상을 말하던 그가 비교적 건강상태가 양호해진 최근 필자가 동석한 가운데 MBC 등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비교적 소상히 밝혔다.

진압군 최후의 보루, 정예중의 정예인 제3공수여단의 일원이었지만 그는 시민군에 결코 총을 겨누지 않았다 했다. 이뿐만 아니다. 그는 광주시민과 대학생들의 원통한 고통과 죽음에 대해 강렬한 몸짓으로 상관들에 항거했다 했다. 실제로 그는 “전두환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81년부터 술을 한 잔 걸치면 입에 달고 살았다. 또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중 유독 악랄하게 시민군을 살해한 하사관들에 대한 적개심을 달래지 못하고 병영내에서 이들 하사관과 격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한다.

"명령은 데모대 중에서 무장한 경우에만 사격을 하게 돼 있었어. (그런데) 얘들 특전사 요원 애들은 무차별 사격했다고, 무차별로. 내가 그걸 봤어. 무차별 사격을...
'서!' 그래서 안 서면 그냥 쏴 버렸어. 무장을 했건 안했건. 도망가면 무서워서 도망가면. 그걸 쏴 죽였어. 이 특전사 애들이. 그러니, 무차별 학살이지 무차별 학살...
나는 광주 시민을 쏘는 특전사를 쏴 죽일라 그랬단 말이야. 근데 그걸 차마 죽이진 못하고..."

"전남대에서 광주 교도소로 이동했을 때 일이야. (시위대가) 탈취해 온 버스가 있었는데 문이 안열려서 문을 억지로 빵 쳐서 열었더니, 운전수가 총을 맞았는데 의자가 뒤로 딱 제껴져 있었어. 운전수가 딱 누워있는데 살아있었어. 그런데 눈에 총알을 맞았어 눈에... 심장은 뛰더라고, 만져 보니까.
버스 앞에는 전부 총알 구멍이야. 총알이 눈에 맞았는데 심장은 살아있고. 그때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몰라.
그걸 어디 묻을 수도 없고, 살아있으니까. (그때만 해도) 암매장한 게 많아, 시신 암매장 한 게...묻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 그래서 운전수를 나무 밑에다가, 그 전남대 산 나무 밑에다가 들어다가 놓고 왔다고 그냥. 살아있으니까. 치료해 줄 수는 없고...그후 이동했는, 그 때 참 처참하더라고.
그 때 전두환이를 죽여야 되고 노태우도 죽여야 되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
매일매일 (그) 생각하면 술이 안 끊어지는 거야 술이. 슬퍼서... 복수를 해야겠다고 불타는 게 아니라 슬퍼서. 그게 슬퍼서 그들의 죽음이 슬퍼서..."

◀ 광주민중항쟁을 진압 중인 공수부대원들. ⓒMBC


광주에서 성남 거여동 제3공수여단 본부로 복귀한 뒤에도 그는 광주참살에 관여한 상사들과 부단히 부딪쳤다.

"내가 술을 먹을라고 남한산성으로 보고를 하고 올라갔어. 거여동에 그 뒷산이 남한산성이었거든요. 거길 올라갔는데 늦게까지 안 오니까 상사인 박OO 중위가 탈영보고를 올렸어. 잡으러 올라와 끌려내려갔지. 두드려 맞고.
화는 났지. “박중위 나와” “내가 보고하고 올라갔는데 너 왜 탈영보고 올렸니”
박중위는 분명 부관실에 있는데 안나오더라고. 그래도 계속 “박OO이 나와" 이러니까 “이 새끼”하고 권총을 딱 들고 나오더라구.
권총을 들고 나오니까 그 때서야 아차 싶더라고. 그래서 그은 거야(왼 손목을 가리키며) 특전사는 이렇게 한 번 자해를 하거나 하면 그냥 지나가. 특전사가 워낙 험악하게 훈련을 받고 험악하게 하기 때문에 ··· 그래 이걸 그어버린 거야. 필름 끊어져서 엄청 취해가지고. 기억이 나는 게 네 바늘 꿰맸는데. 세 바늘째 따끔따끔해서 보니까 의무관 중사가 꿰매고 있더라고. 그래 가지고 일주일을 쉬었어.
중사, 저 애들하고 사이는 좋았는데, 술 먹으면 많이 싸웠어. 왜냐면 이 새끼들이 죽였거든."

탈영보고 사건후 동관이는 엄청나게 구타를 당했다고 했다. 아마 그의 병세는 탈영보고 사건과 이에 따른 자해사건, 이후 살인적인 기합과 구타 등이 잇따르면서 5.18 광주 출동후 잠재해 있던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표면화된 것으로 보인다.

광주 민중항쟁에서 민간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총부리를 겨눈 하사관들과의 잦은 충돌, 살인적인 구타와 집단적인 따돌림, 탈영보고와 자살기도 등··· 고귀한 영혼과 여린 가슴을 지닌 그에게 역사의 질곡과 지옥같은 병영생활은 너무 버거웠던 것일까. 자책감과 분노감을 이기지 못하다 끝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끈을 놓아 버렸다.

부친 홧병으로 돌아가시고 24년간 정신병원 전전

동관이는 제대후 복학과 휴학을 반복하면서 정신병원 신세를 졌다. 1980년대 그가 입원한 병원만 경희의료원, 강남 성모병원, 고대 병원, 용인정신 병원 등 즐비했다. 당연히 직장을 잡을 엄두를 낼 수도 없다. 특히 이 병에 대한 무지와 정신병에 대한 일반의 냉소적인 인식 등이 겹쳐 동관이는 정신병의 초기 치료에 실패한다.

평소 간경화병을 앓으시던 부친께서는 금지옥엽처럼 키운 아들이 몹쓸 병을 얻어 처절하게 망가진 모습을 보고 가슴이 미어진다. 1983년 12월 홧병으로 피를 토하고 돌아가신다.

82년 봄 복학을 한 동관이는 이듬해부터 휴학, 정신병원과 복학 등을 거듭한 끝에 85년 가을 가까스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동관이가 정상적으로 학점을 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배광복(현재 통일부 근무)과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의 도움과 친구 아버지인 이준범 전 고대 총장님의 배려가 있었다.

그에게도 잠시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1991년 3월 이OO씨와 결혼한 것이다. 교회에서 만나 주위의 도움으로 인연을 맺었다. 신접 살림을 신림동엔가 차렸는데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모처럼만에 찾은 정신적 육체적 평온의 시절은 그러나 1993년 아들 OO의 출생 직후 음성정신병원에 장기간 입원함으로써 마감하게 된다.

신혼생활중에도 반포에 있는 용인정신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았지만 환청과 음주, 폭언과 폭행 등이 잇따르면서 상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그를 반기는 곳은 이제 정신병원뿐이었다. 결혼 11년이 다되어가는 2002년 2월 동관이는 아내와 아들의 평화를 위해 합의이혼을 했다. 그러나 두 사람간의 신뢰와 애정은 아직 애뜻하다. 아니 사랑의 끈은 아직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다. 전 부인은 아직까지 동관이의 입원비의 일정부분을 보태며 아들을 튼튼하게 키우고 있다. 동관이도 내심 자신의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염치가 없어서인지 내색을 안 하고 있다.

동관이는 요즘 이혼 당시보다 훨씬 건강상태가 양호하단다. 이혼후 국립춘천병원에서 잘 처방된 약과 자신의 강력한 재활의지 덕택이다.

◀ 아주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오는 김동관(오른쪽), 동관이 모친 김영순 여사, 그리고 전성. ⓒMBC


동관의 친구들

지난 2004년 사법고시에 늦깍이로 합격해 현재 사법연수원에 다니는 전성 예비변호사도 동관이와 같은 서클 출신이다. 그는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감옥생활을 했고 그후 줄곧 재야와 진보 정치운동권에서 자라왔다.

그는 의협심이 강하다. 추진력도 보통이 아니다. 이찬영과 김원갑, 김우진과 나 등 주위의 친구들이 김동관의 처지에 대해 안타까워 할 때 그는 혜성처럼 나타났다.

친구들은 지난 98년 동관이의 아내 이OO씨와 머리를 맞대고 동관이에 대한 명예회복과 군복무중 공상을 입은 군인으로 국가의 보상을 받을수 있도록 법적인 해결을 추진했지만 사회적-행정적-사법적인 장벽에 가로막혀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이제 전성이가 나타나 새로운 힘을 얻고 있다.

전성이는 MBC측에 자신의 방송 아이템을 제시했고 이는 김영호 PD를 만나는 계기가 됐다. 김 PD는 베트남 병사들의 전쟁 후유증에 관한 다큐를 제작하는 등 전쟁의 파괴성을 익히 잘 알고 있는 방송인이었다.

이찬영과 김원갑은 MBC가 촬영 작업이 들어갈 때 방송국과 친구들, 그리고 친구들간의 가교 역할을 자원하며 바쁜 직장생활 와중에 시간을 쪼개어 동관이를 위해 진한 우정을 발휘하고 있다. 김동관이 이처럼 많은 친구들의 헌신적인 사랑을 아직까지 받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오대양같은 마음을 품고 육대주를 누비겠다”던 호연지기와 주위사람들에게 너그럽고 자상하게 대해주는 따뜻한 인간 됨됨이를 30년이 다되도록 친구들이 아직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에필로그

내 친구 동관이의 이야기는 지난 2000년 상영된 또 다른 한편의 <박하사탕>에 비유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두 주인공이 걸어간 길은 정반대다.

영화속 주인공 김영호(설경구 분)가 가학적이라면 김동관은 자학적이다. 김영호가 타락했다면 김동관은 박하사탕처럼 순수하다. 김영호는 박하사탕을 짓이겨 으깨버렸지만 김동관은 박하사탕을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영화속의 김영호는 5월 광주 민중항쟁 발발시 갓 자대에 배치된 신참 육군 이병으로 진압작전에 투입됐다가 칠흙같이 어두운 밤 여학생을 총기 오발 사고로 죽이게 된다. 이 사건은 김영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그는 파괴적이고 가학적인 인물로 변한다. 제대 후 경찰에 투신한 그는 시국사범을 체포해 무자비한 구타와 물고문 등을 자행하는 전형적인 악질 형사로 변한다. 94년 10년간의 형사생활을 청산하고 가구점 사장으로 화려한 변신한다. 그도 잠시. 주인공은 가정 파탄과 잇따른 사업 실패로 폐인이 된다. 99년 가을, 첫 사랑 윤순임(문소리 분)을 암으로 보낸 3일 뒤, 철길위로 올라가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마주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내친구 동관이는 박하사탕의 주인공과 다른 길을 걷는다. 김영호처럼 어엿한 사회생활을 하며 역사에 대한 분풀이라도 해봤으면 덜 후회스럽겠건만. 바보같은 그는 그저 정신병원을 전전할 뿐이다. 그 과정은 자신의 가정과 부모 형제와의 파탄의 연속이다. 역사적 질곡을 조그마한 가슴에 묻은 채 촛불처럼 스스로를 태운다. 그리고 어느 덧 쉰 살이 다 됐다. 이제 우리 사회가 그의 고통에 답할 때다.
황남준 한국금융연구원 초빙연구원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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